변관식 ‘외금강 삼선암 추색’ 1966년작, 125.5x125.5cm 종이에 수묵담채.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그림을 가로지르며 치솟은 저 우뚝한 것이 나무인가, 절벽인가? 아니 이 장면은 꿈인가, 실재하는 풍경인가?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6)은 30대에 8년이나 금강산을 누볐고 이후 두고두고 당시의 감동을 머금어 그림을 그렸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외금강 삼선암 추색’은 소정이 그린 여러 점의 금강산 중에서도 작가의 전성기 개성이 드러나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삼선암은 금강산의 만물상 입구 왼쪽에 솟은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의 세 바위를 가리킨다. 구름이 움직이면 마치 하늘에서 신선들이 내려오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변관식의 그림에서도 화면 중간을 비스듬히 양분하는 상선암에서 마치 생명력을 갖고 치솟은 거목 같은 꿈틀거림이 느껴진다. 바위를 끝까지 그리지 않고 윗부분을 싹둑 잘라낸 파격에서는 거장의 기개 또한 감지된다. 삼선암 꼭대기를 한정 짓지 않고 화폭 너머 무한대로 뻗어나게 한 작가의 의지가 읽힌다. 먹을 주로 쓰고 색이라면 갈색 정도만 사용하는 변관식이지만 추색(秋色) 깃든 나뭇가지에 노르스름한 물을 들여 놓았다. 이 생동감은 삼선암 골짜기로 들어서는 두 가객의 노란 두루마기에 닿았다. 산속 작은 암자에는 툭 떨어진 단풍잎이 자리를 잡듯 이미 네댓 명이 들어앉아 있다. 가을이 다 가버리기라도 할 새라 허리 살짝 굽은 노인의 발걸음은 도포자락이 휘날릴 정도로 분주하다. 제작 시기는 1966년이지만 한복에 갓 쓴 노인들은 조선 시대에서 튀어나온 듯하다. 물기 적은 갈필 때문에 과감하지만 다소 저항적이고 삭막할 수 있었던 풍광은 사람의 등장으로 순간 해학미까지 풍겨, 당장이라도 그들의 뒤를 따라나서고 싶게 만든다. 다녀온 지 이미 20년이 훌쩍 지난 금강산을 그리워 그리며 변관식은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우승(왕유·699~대략 761)의 말을 빌어 화제를 적었다. “시를 지으면 형상 없는 그림이 되고, 그림을 그리면 말하지 않는 시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대개 품격이 빼어나고 정취가 높고 원대하다.”(王右丞 作詩爲無形畵 作畵爲不語詩 大都品格超絶 思致高遠也)
그처럼 그림은 말이 없어도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 변관식은 1937년을 시작으로 해방 전까지 ‘낭인’처럼 금강산의 명승을 다니며 보고 그렸다. 속세를 훌훌 벗어던진 자유로운 생활은 근대 예술가들의 이상이기도 했지만 자연친화와 풍류미학 등 그의 그림이 추구하는 이상향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민족분단을 경험한 20세기 중엽의 금강산은 겸재 정선을 비롯한 조선의 선비들이 유람하던 경치 좋은 산에서 벗어나 민족문화의 상징이 됐다. 따라서 산골짜기 누비는 갓 쓴 노인들은 개성있는 화법을 구사하는 소정의 근간이 조선의 전통에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대인을 옥죈 이념의 굴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변관식 ‘농촌의 만추’ 1957년, 111x264cm 화선지에 수묵담채.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높은 산에서 내려와 들판을 돌아보자. 소정의 1957년작 ‘농촌의 만추’에서는 시골의 구수한 흙냄새가 물씬 풍긴다. 금강산처럼 특정한 어떤 지역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농촌 풍경이라 정겹다. 가을걷이를 끝낸 여유로움은 논둑을 따라 걷는 황소의 커다란 엉덩짝과 목동의 느릿한 걸음에서도 묻어난다. 정성스레 지붕을 이은 초가집에서도 넘치는 풍족함은 아닐지라도 이웃 돌아볼 줄 아는 따스함이 느껴진다. 화가가 평범한 우리네 일상에서 찾아낸 유토피아인 셈이다. 그림에 불탄 그을음 같이 어두운 부분이 많다. 먹을 엷게 찍어 그림의 윤곽을 만들고 그 위에 다시 먹을 쌓듯이 칠하는 ‘적묵법’과 그 위에 진한 먹을 튕기듯 찍어 선을 파괴하며 울동감을 주는 ‘파선법’으로, 변관식의 작품만이 갖는 특징이다.
변관식은 1899년 황해도 웅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의사였고, 어머니가 그 유명한 조선 도화서의 마지막 화원 소림 조석진(1853~1920)의 딸이다. 당대 최고 화가이던 조석진은 외손자를 열두살 때부터 서울로 불러 가업을 잇게 한다. 변관식은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에서 2년제 도화(陶畵)수업을 수업을 마친 후 17세에 외할아버지가 교수진으로 있던 서화미술회에서 본격적으로 공부한다. 전통 서화를 계승하고 후진을 양성하고자 설립된 서화미술회에서 그는 스승인 심전 안중식을 만났고 동인으로 이당 김은호 등과 친분을 쌓았다.
1921년에 제1회 서화협회전에 출품해 등단하면서 본격적인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외할아버지의 별호 ‘소림’과 친할아버지의 호 ‘춘정’에서 한 자씩 따 ‘소정’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부른 것도 이때다. 그러나 등단을 못 보고 1920년 외조부 조석진이 별세했다. 이듬해 어머니를 여의고 설상가상 세 살 난 딸 하나를 남겨놓고 부인마저 세상을 떠난다. 곧 재혼을 했지만 이내 파경을 맞고 소정은 심리적 방황 속에 그림에만 몰두하게 된다.
“조실부모 하고 외가에서 자란 나는 육친의 따뜻한 정을 알 수가 없었으며 첫 번째 아내와의 빠른 사별은 나를 더욱더 쓸쓸하게 만들었고 술과 산천과 그림에 빠져들게 했다. …때문에 나의 한평생은 영원한 여인과 절승을 찾아 헤매는 역정이 되고 만 것 같다. 그렇다고 일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렸고 아름다운 명대산천을 두루 보고….”
변관식은 계간지 ‘화랑’의 1974년 여름호와 그 해 현대화랑 개인전 도록에 실린 ‘나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적었다. 개인사의 비극을 딛고 1923년에는 같이 그림 공부를 한 이상범·노수현·이용우와 함께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화 동인회로 전통 회화를 새로운 근대적 사조와 감각에 맞게 개혁하고자 했으나 재정난 등의 이유로 짧게 활동하고 해체됐다. 어쨌거나 변관식은 전통의 답습만 꾀하는 것은 구식이라 여기고 새로운 변모를 모색한 결과 향토적 자연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근대적 한국 산수화풍 형성에 기여했다. 미술사학자 최순우와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1981년에 ‘한국적 회화미의 정립에 앞선 7인의 거장’으로 변관식과 더불어 이상범·김기창·박수근·이중섭·김환기·유영국을 꼽았다.
변관식 ‘촌락풍일’ 1957년, 133.5x420cm 종이에 수묵담채.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1925년 일본으로 간 변관식은 동경미대에서 청강생으로 공부하고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문하생으로 남종화 화풍을 배웠다. 그보다 10년 먼저 간 의재 허백련이 사사한 일본 화가다. 남종화는 직업화가의 채색화와 대비되는 문인화풍의 그림인데 조선 중기 이후 크게 유행했다. 같은 이에게 그림을 배웠지만 허백련이 남종화 전통을 더 깊이 파고든 것과 달리 변관식은 독특한 자신의 화풍으로 재흡수했다. 정형민 서울대 동양화과 교수는 ‘한국의 미술가-변관식’에 쓴 작가론에서 “남종화의 정신과 기법의 바탕 위에 자신의 기질을 주저하지 않고 펼쳐내 근현대 한국미학의 어법으로 구사할 수 있는 개성적 화풍을 창출했다”면서 “남화(남종화)의 기법 보다는 문인화의 기저를 이루는 야일사상(野逸思想)에 더 큰 매력을 느꼈는지 모른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변관식의 이름 앞에는 야인(野人)과 반골(反骨)의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타협하지 않는 성격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는 총독부 주도의 관전(官展)을 외면했다. 해방 후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화실 ‘돈암산방’을 마련하고 활동하던 1950년대 중반 당시 국전 운영의 편파성을 신문 기고를 통해 수차례 고발하면서 재야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안주하지 않고 산으로 들로 바삐 돌아다니는 그림 속 선비 같은 삶이 시작된다. 오히려 야인생활을 시작한 1957년을 기점으로 그의 화풍은 절정에 올라 실제 풍경과 고전적 이상향이 어우러진 ‘소정양식’을 이룬다. 그는 단절된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전통을 계승한 동시에 역동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화풍으로 독보적 위상을 차지했다.
근대에 태어나 현대를 살다 간 작가는 이런 당부도 남겼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기술이나 방법을 배우기 전에 시대를 사는 정신을 배워야 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