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20년이 남긴 것] 나라곳간·외환보유액은 확충했지만...물쓰듯 쓰다간 또 위기재발

[전직 경제부처 장관들 진단]

지난 1997년 11월5일, 세계적 통신사인 블룸버그는 “한국의 가용 외환보유액이 20억달러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그해 10월28일 미국 투자기관인 모건스탠리의 “아시아를 떠나라”라는 보고서와 달리 블룸버그는 한국을 직접 겨냥했다. 시장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11월7일 주가는 최대폭으로 하락했고 원·달러 환율은 사상 처음으로 1,000원을 돌파했다. ‘외환보유액이 충분하다’고 애써 부인하던 정부는 결국 손을 들었고 보름 뒤인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정식 신청한다.

외환위기는 말 그대로 국가가 보유한 외환, 특히 기축통화인 달러가 부족해 일어난 결과다. 참담한 경험을 한 뒤 ‘환란이 다시 와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상시 모니터링하고 경제체질을 튼튼히 하는 데 온 힘을 썼다. 나라의 곳간과 외환보유액 확충이 대표적이다. 국가 재정은 튼튼해졌다. 외환도 마찬가지다. 수치로 볼 때 지금의 한국 경제는 20년 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다. 달러 보유액은 10월 말 기준 3,844억달러로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많은 나라가 됐다. 2014년 하반기부터 순대외채권국이 됐다. 경상수지는 66개월 연속 흑자 행진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 국가부채 비율은 43.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일곱 번째로 낮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는 게 전직 장관이나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은 외환위기 2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 참석해 “외환위기는 물이 끓는 것과 같다. 어떤 계기로 기화점을 지나면 갑자기 수증기로 변해 사라지는 몰락 과정을 겪는다”고 말했다. 한순간이라는 얘기다.

경제부처 장관을 지냈던 한 전직 고위관료들의 진단도 비슷했다. 한 전직 장관은 “외교안보적 상황이 워낙 위중해 (미국에서) 잘못된 신호가 나오는 순간 상황은 순식간에 바뀌고 외환은 썰물처럼 빠져나갈 수 있다”며 “최고 수준의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3,800억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액을 자신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재정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가 재정을 통한 성장을 꺼내고 있는 데 대한 우려가 많다. 최저임금 급등으로 정부가 인건비를 보조하는 3조원 규모의 일자리안정자금을 비롯해 기초연금 확대, ‘문재인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등 새 정부의 국정과제에 맞춘 2018년의 복지·고용 분야 지출만도 30조원에 달했다. 특히 새로 증액된 재정지출은 내년에만도 최소 11조1,000억원이다. 복지·고용정책은 해를 거듭할수록 지출 규모가 커지는 구조인데다 시작하면 없애거나 줄이기 힘들어 다음 정권은 물론 장기적인 국가재정에 큰 부담을 줄 가능성이 높다. 기획재정부와 국회예산정책처 등에 따르면 내년 정부 총지출 규모는 올해보다 7.1% 증가한 429조원이다.

재정지출 증가로 장기적으로 국가채무가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최근 공무원 증원과 아동수당 도입, 기초연금 인상과 최저임금 인상분 지원 등 네 가지 정책으로 국가채무가 내년 743조9,000억원에서 2060년 1경5,499조원까지 증가할 것으로 추산했다. 지난해 말 예산정책처 추계보다도 약 3,400조원이 불어난 것이다. 장기적으로 국가 재정이 악화되리라는 지적이 커지자 정부도 장기 재정전망을 다시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기재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복지 소요 논란에) 장기 재정전망을 내놓을 필요성에 내부적으로 공감하고 있다”며 “정확한 추산 시점은 내부적으로 검토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장기 재정전망은 2015년 발표했고 법적으로 5년마다 하도록 돼 있지만 국가적 논란이 큰 만큼 이를 앞당기겠다는 것이다. 정부 역시 재정불안 가능성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빈난새기자 binthe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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