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부문 영리규제 해소 정책에 반대하는 의료보건노조 관계자들이 시위를 하고 있다. 정부가 서비스 산업의 칸막이식 규제를 풀어 경쟁력을 높이려 하고 있지만 관련 업계의 반발로 수년째 진통을 겪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997년 1월23일 한보그룹의 최종 부도는 환란의 서막이었다. 한보 도산의 충격이 채 사라지기 전에 삼미그룹·진로그룹·기아자동차그룹·해태그룹·뉴코아그룹 등이 연쇄적으로 도산했다. 과도한 차입경영과 선단식 경영 탓에 계열사 한 곳이 흔들렸지만 그룹 전체의 부도로 이어졌다. 환란의 경험이 뼈아팠던 만큼 지난 20년간 기업들은 변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제조업 부채비율은 1997년 396.5%에 달했지만 올 2·4분기 말 66.7%에 불과하다. 같은 기간 차입금 의존도 역시 54.22%에서 20.0%로 개선돼 갑작스러운 금융 위축에도 다수 기업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기초체력이 탄탄해졌다. 100대 기업의 현금성 자산은 127조원에 달할 정도다. 백웅기 상명대 총장은 “외환위기 때와 비교해 부채비율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며 “대마불사식의 경영 방식이 바뀐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수출도 이달 13개월 연속 증가 기록을 세울 것이 확실시되고 증시도 역대 최고 수준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규제를 쥐고 있는 정부는 20년째 “규제 완화로 투자를 이끌겠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작 투자할 기업은 “마땅한 곳이 없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핵심적인 규제를 풀지 못한 결과다. 경제부처의 한 전직 장관은 “솔직히 어떤 규제를 풀어야 투자를 이끌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모두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대기업 편들기 등의 프레임에 갇혀 그것을 건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솔직히 수도권 규제 완화, 서비스발전법·규제프리존법 등만 풀어도 4차 산업혁명은 물론 대규모 제조업에 대한 투자를 이끌어낼 수 있다”면서 “그럼에도 다들 명분과 체면만 내세울 뿐 실행은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기업의 손발을 꽁꽁 묶는 규제와 신산업 육성을 포기한 금융은 기업의 투자를 더욱 움츠리게 했다. ‘규제 완화’라는 정답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지만 새 정부는 출범 이후 줄곧 분배 중심의 소득주도성장만 강조했다. 혁신성장의 실종을 지적하며 경제계가 오랫동안 아우성을 낸 뒤에야 정부는 올 9월 말 ‘혁신성장 주요대책 발표 일정’이라는 한 장짜리 참고자료를 내밀었을 뿐 여전히 서비스업 대책이나 규제프리존, 수도권 규제 완화 같은 핵심규제가 풀릴지는 알 수 없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창업환경도 여전히 어렵다. 아산나눔재단과 구글캠퍼스서울의 ‘스타트업코리아!’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년간 세계 누적 투자액 상위 100개 스타트업의 사업모델을 한국에 적용한 결과 13곳은 사업 자체가 불가하고 44곳은 조건에 따라 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 택시와 비슷한 ‘우버’는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때문에, 관광숙박의 대안으로 떠오른 에어비앤비는 공중위생관리법 때문에 한국에서 설립할 수 없는 식이다. 핀테크만 보더라도 국내에서 해외송금서비스를 하려면 자기자본이 20억원 이상 돼야 하는데 이는 스타트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데이터는 4차산업 혁명시대의 석유로 불리는데 공공데이터 가운데 민간이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데이터는 0.2%에 불과하다. 이런 규제장벽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의 사업화를 원천봉쇄한다는 지적이다.
금융 또한 성장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20년 전 여신을 남발하다 기업 줄도산과 함께 부실에 내몰려 인수합병(M&A)으로 재편된 은행은 리스크 관리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 자기자본비율(BIS)은 1997년 말 당시 국제 기준(8%)에 못 미치는 7.04%였지만 올 상반기 현재 15.37%까지 상승했고 수익성 지표인 총자산순이익률(ROA)도 같은 기간 -0.90%에서 0.62%로 높아졌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돈 떼일 일이 적은 주택담보대출에 집중한 결과로 풀이된다. 신한은행·우리은행·KEB하나은행 등의 기업대출 비중은 1999년 70~90% 수준에서 최근 40%대로 떨어진 반면 가계대출 비중은 30%가 채 되지 않았지만 지난해 말 기준 43%까지 올라갔다. 산업의 역동성을 살리는 윤활유 역할을 해야 할 금융이 기업 앞에 꽉 막힌 셈이다./세종=임진혁기자 libera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