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토목의 변’을 아십니까…명을 구한 조선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역사를 잘 아는 사람들 중에서도 15세기 중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대한 분수령이었던 ‘토목의 변’이라는 사건을 아는 이가 드물다. 더욱이 그 시대 조선이 이 사건을 평화적으로 해결함으로써 동아시아 국제전쟁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은 명과 몽골의 무역마찰이었다. 한 때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이었지만 제국의 분열로 힘을 잃고 명에 의해 북방의 초원으로 쫓겨난 뒤에는 바다와 육지를 망라한 철저한 봉쇄로 좀체 외부세계로 나가지 못한 채 조선 및 명과의 국경도시 중심의 제한된 무역에 기대어 겨우 국가경제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

1435년 명의 선덕제가 38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겨우 9세의 주기진이 황태자로서 황제(정통제, 영종)로 즉위했다. 그 후 어린 주기진은 자신을 업어 키운 환관 왕진을 누구보다도 믿고 따르게 됐고, 이 때문에 환관 왕진은 황제를 능가하는 최고의 권력자가 됐다.

그런데 권력자가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하다. 황제를 환락 속에 가둬두고, 끊임없이 자기 사람으로 조정을 채워나가기 위해서는 막대한 황금이 필요한 법이다. 그래서 왕진은 몽골족이 차지하는 무역이익에 군침을 흘리게 되어 명태조 이래 150년 동안 이어 온 관례를 깨고, 명의 조정으로부터 은상을 받는 몽골사절단의 수를 절반 수준인 1,500명으로 줄였다. 교역대상인 말 값도 5분의 1로 줄였다. 그리고 그 차액을 자신의 정치자금으로 챙기는 바람에 그의 사저에 붙은 60여개의 창고에는 진귀한 금은보화가 가득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무역이익을 뺏긴 몽골족은 곤궁을 견디지 않고 전쟁을 불사했다.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봉쇄를 일삼는 명에 대한 불만이 폭발직전인데다 원 왕조가 북경에서 축출된 후 서쪽의 오이라트족과 동쪽의 타타르족이 처음으로 통일을 이뤄 강력한 힘을 외부로 분출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던 몽골이었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에 몽골은 명의 상대가 되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통일을 이뤄 응집된 힘은 겉보기와 판이했다. 명의 50만 대군은 전투다운 전투 한 번 못하고 10분의 1에 불과한 오이라트군에게 처참하게 패배하고, 황제는 포로가 됐다.

50만 대군이 토목이라는 작은 성에 갇혀 서로 우왕좌왕하다가 내분이 생겨 총사령관인 왕진은 부하인 호위장군 번충이 휘두른 철퇴에 맞아 죽었고, 호위장군 번충과 병부상서 광야, 영국공 장보는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고 죽음을 맞았다. 극심한 혼전 가운데 황제는 영문도 알 수 없어 아예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적군을 맞았다.

명군의 움직임을 보면 삼척동자라도 패전의 이유를 알 수 있다. 1449년 8월 영종이 전선에 도달하자마자 최전선의 명군이 전멸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명군은 아무 대책이 없었다. 황제나 총사령관격인 왕진은 병법이나 전선의 상황을 하나도 알지 못했고, 따라 나선 장수들은 전쟁보다는 권력자인 왕진의 눈치만 살피며 갈팡질팡할 지경이니 제대로 된 전략이 수립될 리 없었다.

급작스런 패전 소식을 들은 왕진은 겁에 질려 서둘러 북경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그는 군사의 수만 믿고 여유를 부리면서 북경으로 가는 지름길을 택하지 않고, 자신의 위세를 만천하에 보일 요량으로 고향인 울주를 거쳐 회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다 얼마 후 회군경로를 번복했다. 50만 대군이 먹일 양식만 해도 엄청난지라 자칫 고향에 들렀다가는 고향사람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때문이었다.

이렇게 갈팡질팡하는 명군의 모습을 보고 답답해진 병부상서 광야는 황제를 호위하는 정예부대를 편성해 황제를 먼저 북경에 가까운 거용관으로 피신시키자고 진언했지만, 자신의 권위를 잃을까 두려운 왕진은 “황제의 위엄과 50만 대군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한마디로 병부상서의 의견을 무시해 버렸다. 그러다가 명군은 오이라트군의 급습을 받게 됐고, 다급한 나머지 토목이란 조그만 성채로 무작정 도망을 쳤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토목에는 50만 대군이 지내기에 너무 좁은데다 양식은 물론 마실 물마저 턱없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좁은 성안에 갇혀서도 당장 시급한 식수를 어떻게 확보하느냐의 문제로 입씨름하기 바빴고, 적의 공격에 대비한 전략은 논의될 틈도 없었다. 그러니 명군의 처참한 패배는 사전에 뻔히 예견된 결과였다.


토목에서 50만 대군을 궤멸시키고, 명 황제를 포로로 잡은 몽골군은 기세를 몰아 명의 수도인 북경을 포위했다. 포위된 북경의 조정과 백성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일부 중신들은 보따리를 챙겨 놓고 남쪽으로 수도를 옮겨 후일을 도모하자고 핏대를 올렸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을 받고 남쪽으로 수도를 옮겼다가 왕조를 송두리째 빼앗긴 송(宋)의 전철을 밟을 수 없다는 조정의 여론에 힘입은 병부시랑 우겸의 주도로 영종의 이복동생인 주기옥을 새로이 황제로 등극시키고, 몽골군과의 항전을 결의했다. 그러나 현실은 암담했다. 50만 대군을 깨트리고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적군을 상대로 한 전투는 승패를 떠나 수도가 불타고 황폐화되는 참극을 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명의 운이 다하지 않은 탓인지 너무나 든든한 구세주가 나타났다. 몽골군의 바로 등 뒤에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조선이 있었다. 그 당시 조선은 몽골족과 동족인 타타르, 여진과 기마를 이용한 전투경험도 많을 뿐 아니라 불과 10여년 전에는 타타르, 여진을 아우르고 북방 국경지역에 사군육진(四郡六鎭)이라 불리는 10개의 교역도시 겸 군사도시를 건설할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갖고, 동아시아 평화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데다 과연 조선은 명조의 기대와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명군이 처참하게 패하고 수도마저 포위된 위급한 상황을 보고서도 조선은 명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선포하고, 몽골군에게 북경에 대한 포위를 풀라고 압박했다. 북경에 대한 포위를 계속할 경우 사군육진을 중심으로 배치된 국경의 정예 군사력을 동원해 타타르족의 본거지를 공략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다보니 오이라트와 타타르가 연합한 몽골군은 바로 눈앞의 그물에 든 풍요롭고 살찐 사냥감에 군침을 흘리면서도, 차마 발길을 내딛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눈치만 살피는 형국이었다.

군사적 압박에 더해 조선은 몽골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절묘한 당근을 제시했다. 북경포위를 풀고 전쟁을 그칠 경우 왕진에 의해 억압된 마시장(馬市場)의 무역을 회복함은 물론 조선 국경도시에서의 무역을 폭넓게 허용할 것을 약속했다. 이렇게 되자 몽골족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선심을 쓰듯 스스로 북경포위를 풀고, 망설임 없이 군마를 북으로 돌렸다. 포로로 잡힌 황제는 몸값 한 푼 내지 않고, 터럭하나 다치지 않고 북경으로 귀환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조선의 후예로서 15세기 국제질서의 향방을 결정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무려 150년 동안 나라 사이의 전쟁이 없는 아시아의 평화시대를 탄생시킨 위대한 역사의 공적을 알지 못할까? 그리고 왜 이처럼 어마어마한 역사적 사실이 지식과 정보의 홍수시대라는 지금에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고 있을까?

과거 우리는 역사를 제대로 알기가 어려웠다.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해 오로지 외세에 의존해 권력의 특권유지를 꾀했던 양반계급이 수백년 동안 온 나라를 차지하면서 역사를 마음대로 주물렀기 때문이다. 전체 인구의 1할도 안되는 조선의 양반들은 3할에 이르는 백성을 노비로 마음껏 부려먹기 위해 인간성을 부인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생산에 종사하는 6할의 백성을 농·공·상으로 나눠 차별하고, 상공인을 천시해 생산의욕을 저하시킴으로써 나라의 발전을 가로 막았다. 그럼에도 양반의 탐욕은 그칠 줄 모르고, 차별과 수탈체제를 법과 제도로 정착시켜 대대손손 이어지게 했다.

이러한 만행은 양반들에게 백성을 존중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백성의 생각은 알 가치도 없는 것이라 여기고, 권력을 향유하며 공맹의 도를 읊조리는 것을 인생의 유일한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권력의 원천이 백성이라는 사실은 수천년 인류문명을 통해 드러나는 역사의 진리이다. 이 때문에 백성을 무시하는 양반들로서는 항상 권력의 정당성에 목이 마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해 부족한 권력기반을 그들이 독점하는 외세의 도움으로 메꾸려 했던 것이다.

조선의 소수 양반들은 수백년 동안 모화사상(慕華思想)을 내세워 다수 백성의 인권을 짓밟고, 계급적 특권유지를 누리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모화라는 단어와 사상이라는 단어는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 백성을 착취하기 위해 외세를 숭상하는 행동은 탐욕의 산물일 뿐, 지성과 이성의 산물인 사상이라는 말과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모화라는 말에 억지로 사상을 붙인다면, 백성을 착취하기 위해 외세를 독점하는 양반들의 의도는 ‘착취사상’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소위 말하는 모화사상의 시각에서 보면, 백성들이 제 나라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은 극도로 불순하고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조선의 양반들은 자신들이 떠받드는 명의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기 위해 명을 구한 조선의 역할을 역사의 기록에서 지우려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백성들이 외국의 사정을 알지 못하도록 해금과 쇄국을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삼았듯이 의도적으로 국사를 세계사와 단절시키지는 않았을까?

지금은 천만 다행스럽게도 양반의 시대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근본법인 헌법 첫머리의 제1조 제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연이어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백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를 보면 우리도 드디어 ‘양반의 나라’가 아닌 ‘백성의 나라’에서 살게 된 셈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양반의 나라를 벗어나 백성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까? 찬란한 문명의 시기에 뚜렷하게 존재했던 자랑스러운 역사조차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그런 말을 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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