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환란...그후 20년] "경제, 과잉정치 덫 빠져...대통령이 '슈뢰더식 노동개혁' 이끌어야"

■릴레이 인터뷰-IMF협상 진두지휘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
정권마다 노동·자본 한쪽 치우친 정책에 시장 위축
20년전 장기불황의 늪에 빠졌던 일본과 판박이
금융·산업정책도 혁신 못해 또 하나의 위기 잉태
개헌과 함께 국가이익 우선하는 경제여건 만들 시점
정치가 솔선수범해 경제 추동력 되살리기 나서야

외환위기 20년 시리즈 관련 정덕구 전 장관 인터뷰./송은석기자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0년간 한국 경제는 정치의 하위개념으로 전락해 과잉 정치화, 과잉 이념화의 덫에 빠져 있습니다. 경제 생태계 전반에 걸쳐 기득권 세력의 담합 체계가 고착화되고 생태계 자체가 침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20년 전 장기 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와 판박이입니다.”

지난 1997년 11월21일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을 선언한 후 IMF 측과의 협상을 진두지휘했던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13일 서울 여의도 니어재단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이같이 말했다. 정확히 20년 전 환란을 목도한 전직 관료인 정 이사장의 눈에 대한민국은 여전히 가라앉고 있었다.

정 이사장은 “정치가 경제의 상위개념으로 군림하면서 보수 정권 10년, 진보 정권 10년 동안 각 정권의 이념적 잣대에 따라 경제정책을 펼쳤다”면서 “경제가 정치와 이념에 의해 침윤(浸潤·차차 젖어들어감)되면서 자신감을 잃고 위축됐다”고 지적했다. 특히 과거 정권이 경제의 두 가지 구성 요소인 ‘노동’과 ‘자본’ 가운데 한쪽에만 치우쳐 외발자전거를 타는 양상을 보여왔다고 꼬집었다.

정 이사장은 “이념화된 정당정치로 5년마다 주력부대(정권교체)가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은 보수는 자본이라는 외발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반대편을 무시하고 진보는 노동 중심으로 외발자전거를 타는 것”이라며 “그러나 외발자전거는 오래 못 탄다. 오래 타려면 두 발로 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나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도 두 발로 자전거를 탔다”며 “진보·보수 모두 외발자전거만 타다 보니 관료들도 ‘5년만 참자’는 보신주의가 팽배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특히 정 이사장은 “5년마다 정권이 교체되는 대통령 5년 단임제와 함께 현행 정당제도·선거제도로 인해 정치적 담합 구조가 공고화되고 있다”며 “이제는 진보·보수정권을 떠나 노동과 자본 모두를 챙기는 두발자전거 경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치 리스크가 점증하고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정 이사장은 “경제 리스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바로 폴리티컬 리스크(정치 리스크), 파이낸셜 리스크(금융 리스크), 관료의 오퍼레이셔널 리스크(운영 리스크)”라며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국내 폴리티컬 리스크가 엄청 커켰다”고 지적했다.

정 이사장은 경제나 시장에 정치나 이념이 너무 깊숙이 개입하는 정치 과잉 현상이 깊어지다 보니 시장논리의 경제 생태계가 교란되고 있다고도 했다. 경제 생태계의 각 주체인 기업(생산자), 가계(소비자), 금융·복지(분해자)가 저마다의 기능을 하면서 ‘생성-성장-소멸-재생성’이라는 순환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정치·사회·경제 생태계가 모두 영합적 공존 체제로 뒤엉켜 있어 전혀 변화를 도모하지 않는 데까지 왔다”며 “이러한 모습이 20년 전 장기 침체의 늪에 빠진 일본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과 정부 사이의 역할 분담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고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의 생산성이 떨어지면 ‘생태계의 반란’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정 이사장은 “외환위기 후 20년간 정부의 금융정책과 산업정책이 혁신하지 못하고 실패하면서 또 하나의 경제 위기를 잉태하고 있다”는 주장도 내놓았다. 대표적으로 금융정책의 경우 은행을 지주회사로 만들어 책임은 회피하면서 권한은 다 행사하는 재벌처럼 돼버렸다고 그는 지적했다. 지주회사의 회장으로 정치적으로 강한 사람이 오기 시작하면서 인사에 있어 관치 금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됐고 은행도 계속 정부에 의존하게 됐다는 것이다.

금융이 여신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 좀비 기업들을 끌어안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우조선해양이나 한진해운 사태가 발생하게 됐다고 정 이사장은 비판했다. 그는 “외환위기 직후 부실 은행에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해 살려놓자 수지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며 은행 간 예대마진 담합 등을 정부에서 눈감아주면서 땅 짚고 헤엄치기를 했다”면서 오늘날도 한국 금융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근본적으로 산업정책을 바꿔 부가가치 사슬 구조를 중국과 경쟁할 수 있도록 바꿨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정 이사장은 “한국 경제라는 배가 엎어지지 않고 순항하려면 복원력과 추동력이 있어야 한다”면서 “한국은 제조업 기반이 강하기 때문에 복원력은 탄탄한 반면 추동력이 매우 약해졌다”고 말했다. 한국 제조업에 대한 전 세계적인 수요가 있기 때문에 수출이 늘어나면서 복원력은 확보했지만 잠재성장률로 대변되는 추동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 이사장은 “올해 경제성장률이 3.0%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지만 수출과 재정에서 온 것”이라면서 “환자에게 죽을 먹인다고(재정 투입) 환자가 힘을 낼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또 “임금은 오르는데 일은 안 하면서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등 노동 시장이 이완되고 있다”면서 “문재인 정부는 최저임금도 올리는데 노동생산성을 올리는 운동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과 함께 경제를 구성하는 자본 측면에서도 정 이사장은 “한계기업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본의 한계 효율이 떨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 경제가 생태계 변화와 함께 추동력이 떨어지면서 정체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추동력을 확보해 이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정 이사장의 생각이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 등이 제로 성장을 하고 있지만 표류하지 않는 것은 배가 워낙 크기 때문에 추동력이 약해도 파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우리처럼 중간 규모의 배는 추동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변화가 불가능한 구조가 된 일본과 달리 한국은 회생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라고 정 이사장은 평가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 모두 경제의 과잉 정치화라는 점은 같지만 일본은 자민당 1당 독재체제에 접어들면서 변화를 싫어하는 DNA가 생기며 변화가 불가능한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반면 한국 경제는 과잉 정치화와 과잉 이념화에 의해 염장(鹽藏)된 것으로 근본적으로는 다이내믹하고 역동적이기 때문에 정치가 솔선수범해 과잉 정치를 탈피하면 리바이벌(회생)의 여지가 많다고 그는 진단했다.

20년이 지나도 제2 환란의 위기 가능성이 어른거리는 데 대해 정 이사장은 “대한민국 정치가 솔선수범하고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나서서 정치 과잉을 탈피해야 우리 경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생태계에 고착화된 단절과 담합을 깨는 노력을 해야 한다”면서 “포괄적 사회노동개혁을 이끈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와 같은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국가 구조조정을 위한 ‘어젠다 2010’을 제창하고 기업들의 해고 요건 완화와 실업급여 지급 기간 단축 등 ‘하르츠 개혁’으로 불리는 노동 개혁을 추진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성공한 정책으로 인해 다음 총선에서 패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다음 10년·20년을 두고 기초 여건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라면서 “개헌과 함께 정당제도 및 선거제도 개선,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 공동체 이익을 우선하는 가치 추구를 위한 도덕적 재무장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직 관료가 이날 던진 화두는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들일 수 있지만 20년 동안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실천을 추동하지는 못했다는 뼈아픈 반성을 하게 하는 대목이다. /노희영·김기혁 기자 nevermind@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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