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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우리나라는 미국의 탈퇴로 힘이 빠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대신 RCEP에 먼저 올라타며 거대 경제블록들의 헤게모니 전쟁 틈바구니에서 줄타기를 재개하게 됐다. RCEP는 중국이 주도적으로 추진해왔지만 높은 수준으로 역내 교역을 자율화하는 데 성공하면 오히려 우리나라가 중국의 무역장벽을 낮추는 지렛대로 이용할 수 있다.
아태 지역 주요국 정상은 이날 마닐라 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RCEP 정상회의를 열어 2018년까지 RCEP 협상을 타결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정상들은 이날 공동성명을 통해 RCEP의 거대한 잠재력에 공감하고 공평한 경제발전과 경제통합을 심화하는 데 기여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 또한 참여국 간 발전 수준을 고려해 협상의 유연성을 발휘하기로 했다.
문 대통령도 당초 해당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최종적으로 불참했다. 앞선 다른 정상간 일정 등이 현지에서 줄줄이 지연되면서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 없었던 탓이다. 대신 우리측에선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등이 참석했다.
RCEP 협상 참여국은 현재 한국·중국·일본·호주·뉴질랜드·인도 등 6개국과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회원 10개국이다. 이들 국가만 따져도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며 전 세계 국가들의 국내총생산(GDP) 합산액과 총교역액의 약 3분의1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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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우리 정부는 협정 참여국들이 자유무역의 혜택을 고루 누릴 수 있도록 각자 좀 더 열린 자세로 유연성을 적극 발휘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달라고 당부했다. 역내 국가 중 상대적으로 경제력 열위인 나라들이 교역의 문을 한층 더 열고 난 후 무역수지 적자 심화의 부작용을 겪지 않도록 하자는 취지다.
RCEP 공식협상은 지난 2013년 5월부터 20차례에 거쳐 이뤄졌고 이와 별도로 같은 기간 9차례의 장관회의가 열렸지만 그동안 진전을 내지 못해왔다. 개방 정도에 대한 국가별 시각차가 큰 탓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일본·호주 등은 높은 수준의 개방을 원하고 있다. 역내 수출입 품목 중 약 90%(개방도 90%)에 대한 관세 인하나 무관세 적용 등의 로드맵을 짜서 적용하자는 것이다. 반면 중국,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상당수 국가는 이보다 개방 수준을 낮게 잡자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개방도를 약 70% 수준으로 낮춰 잡자는 의견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우리 정부가 RCEP 적용의 유연한 적용을 주창한 것도 이 같은 협상국 간 간극을 좁히기 위한 차원이다. 특히 이를 위해 상품 시장 추가 개방과 관련해서는 회원국 모두에 적용되는 공통의 양허 방식을 적용하되 국가별 다양성을 반영할 수 있도록 절충안이 모색되고 있다. 즉 관세 인하 및 철폐 등에 대한 회원국 공통 양허를 추진하되 이와 병행해 각국이 자국 상황을 고려한 후속 양허안을 교환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우리 정부는 아울러 RCEP를 지렛대로 삼아 기존의 양자·다자간 FTA를 개선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 특히 한·아세안 및 한·인도 FTA의 경우 기존의 개방 수준이 낮고 체결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만큼 현재의 상황을 반영하고 보다 높은 개방이 이뤄질 수 있도록 개정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무엇보다 해당 국가들에 철강·화학·섬유 등의 시장을 추가 개방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협상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RCEP 타결 시 역내 원산지 기준 문제가 일괄 해소될 수도 있다. 한 고위 외교 당국자는 “기존에는 아태 지역 국가들 간에 FTA를 맺었어도 원산지 기준이 제각각이어서 우리와 상대국 간 교역 시 애로점이 있었다”며 “RCEP 협상이 완결되면 16개 회원국 모두가 동일한 원산지 기준을 적용 받게 돼 우리 기업들의 수출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닐라=민병권기자·이태규기자 newsroo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