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으로 아파트가 완전히 부서진 대서아파트에 사는 김태근(68)씨는 무너진 집과 차에서 홀로 쪽잠을 자며 지내다 21일 흥해실내체육관에 자리를 배정받았다.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3년 전 홀로 서울에서 고향으로 내려온 김씨는 어머니가 체육관 옆 요양원에서 지내 한숨을 돌렸다. 그는 “소파 같은 푹신한 자리에 있으면 곧바로 잠이 들지만 1시간을 넘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도 실내체육관 텐트 안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잠이 들었지만 곧 쿵쾅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들은 지진 같은 ‘정신적 외상(trauma)’에 취약한 아동·청소년·임신부·노인·우울증환자 등 고위험군의 경우 불안·짜증·무력감 같은 스트레스 반응이 급성 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stress disorder·지속적인 정신적 재경험 고통)’로 악화할 수 있으므로 ‘포항 현장 심리지원단’과 가족 등이 잘 돌봐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등으로 구성된 심리지원단은 주민들의 스트레스 반응을 관리하고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지지 않도록 상담·심리지원 서비스 등을 제공한다.
다만 지금은 포항 주민 등의 불안감을 질병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는 피해복구와 심리적 지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여진이 이어지고 있는데다 지진 사망자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스트레스 장애 같은 극단적 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드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정석훈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집이 부서지고 여진이 계속되는 상황이어서 ‘일상으로 빨리 복귀하는 게 트라우마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원론이 설득력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피해복구에 적극 나서고 여진이 일단락됐다는 확신이 전제돼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경주 지진 발생 당시 심리지원단으로 활동한 박재홍 경주시정신건강증진센터장은 “지진으로 인한 불안감이 스트레스 장애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여진을 경험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며 “지진 심리치료를 해도 여진이 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만큼 최소 한 달 정도 현장을 떠나 있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지진의 진앙지인 포항시 흥해읍 망천리 주민뿐 아니라 불안감이 심각한 고위험군 환자들에게 정부 차원에서 한 달 이상 거주할 수 있는 집단 대피소를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지진 관련 정보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은 피하는 게 좋다. 지진 뉴스를 끊임없이 보면 불안과 스트레스가 가중되기 때문이다. 공포증은 위험을 계속 곱씹는 과정에서 악화되기 마련이다. 다만 지진공포증을 극복하려면 지진 발생 시 대처 요령을 익혀둬야 한다. 대피처·안전수칙 등을 알아두면 막연한 불안감을 떨쳐내고 자기통제감을 높일 수 있다.
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반응이나 장애를 완화하거나 예방·치료하려면 가족·동료·이웃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며 서로 용기를 북돋고 지원단의 상담·심리지원 서비스를 받는 게 좋다.
그래도 불안·불면증이 여전하고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다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를 찾아가 증상을 설명하고 약물치료를 받는 게 좋다. 김정현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평소에도 예민한 성격이어서 지진 이후 극도로 불안하고 안절부절못하거나 호흡이 가빠지고 메스꺼움 등 신체 증상이 빨라진다면 효과가 빠른 항불안제(신경안정제)와 복용 2주쯤 뒤부터 효과가 나타나는 항우울제(SSRI 계열)를 함께 복용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또 “급성 스트레스 장애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보다 가볍게 지나가고 치료도 잘되는 편”이라며 “다만 급성 스트레스장애가 있으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생길 위험이 더 커진다”고 덧붙였다.
포항 지역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험생은 재난으로 인한 걱정·불편과 불안·초조감이 겹쳐 가슴 두근거림, 현기증, 식은땀, 소화불량 같은 증상이 수시로 나타날 수 있다. 부모가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게 도움이 된다. /임웅재·김경미기자, 포항=장지승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