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병 치료 '유전자 가위' 기술 갖고도...생명윤리법에 무용지물

<규제 덫에 걸린 4차 산업혁명 >
빅데이터, 개인정보 보호에 막혀 의료서 활용 못하고
금융산업 '전업주의' 규제에 블록체인 등 빛 못봐
해외서 인기 높은 우버 등 공유서비스는 아예 불법
규제프리존법도 지지부진...4차 혁명 낙오자 우려

최근 ‘유전자 가위’로 DNA를 자르는 순간을 포착한 영상이 트위터를 통해 세계 최초로 공개돼 큰 관심을 끌었다. 유전자 가위는 문제가 있는 유전자만을 잘라내 교정하는 기술로 암·에이즈 등 각종 난치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있어 ‘신의 도구’로까지 불리고 있다. 유전자 가위 가운데서도 현재 가장 앞선 3세대 원천기술을 보유한 기업은 전 세계에 4곳이다. 그 중 한 곳이 한국의 툴젠이다.

하지만 한국은 정작 유전자 가위를 이용한 치료제 개발에는 뒤처지고 있다. 유전자 가위를 체내에 집어넣어 치료하는 것을 금지하는 생명윤리법 규정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체내 유전자 치료를 법률로 금지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고 알려졌다. 규제가 혁신적인 신산업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사례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1일 서울 상암동 에스플렉스센터에서 열린 4차산업혁명위원회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백승욱 4차산업혁명위원의 발표를 듣고 박수 치고 있다. /연합뉴스
많은 산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열기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사실 많지 않다고 말한다. 신기술이야 민간이 알아서 발굴해 길을 찾아가면 되는 것이고 정부는 그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해주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김주훈 한국개발연구원(KDI)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신산업 육성에서 정부가 해줘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규제 정비와 인프라 구축”이라며 “그 가운데 규제 정비만 제대로 해줘도 절반 이상은 할 일을 다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자’는 정부가 정작 규제 개선에는 허송세월로 일관하고 있어 미래 먹거리 발굴 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빅데이터도 손을 놓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다. 전문가들은 빅데이터야말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바둑에서 인간을 꺾어 파란을 일으킨 구글의 알파고도 기술의 원천은 빅데이터에 있었다. 빅데이터가 의료 기술과 융합되면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개인의 건강 특성에 맞는 치료나 관리를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개인정보를 기술·서비스 개발에 활용하는 것이 제한돼 있다. 지난해 6월 정부는 ‘개인정보 비식별 조치 가이드라인’을 제정해 개인정보가 포함된 빅데이터를 비식별 처리 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놨지만 이는 법적 구속력이 없어 결국 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 등을 개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유영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지난 7월 “인공지능(AI) 등 신산업 발전을 위해 데이터 상용화가 굉장히 중요하며 전향적으로 바라보겠다”고 밝혔지만 아직까지도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다.

금융산업도 낡은 규제 탓에 혁신이 더딘 분야 중 하나다. 블록체인·핀테크 등 신기술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산업자본의 금융업 진출을 막는 ‘은산분리’, 은행·증권사·보험사 등이 고유 업무만 하도록 한 ‘전업주의’ 등 규제가 산업 발전을 원천적으로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김연희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아시아태평양 유통부문 대표는 “우리 금융산업은 규제 장벽이 높고 정부의 입김이 세다 보니 금융기관들이 소비자가 아니라 정부만 쳐다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내부에서조차 이런 규제들에 대한 회의론이 커져가고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요즘에는 보험과 은행이 하는 업무가 거의 비슷해 전업주의가 큰 의미가 없으며 은산분리는 몇몇 금융기관들이 수십년간 독점 체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우버·에어비앤비와 같은 공유 서비스는 한국에서는 아예 불법이다. 여기에 규제를 폭넓게 풀어줘 창의적인 시도를 활성화하자는 규제프리존법·서비스산업발전법에 대한 논의는 지지부진하다. 한때 정부·여당이 규제프리존법을 전향적으로 검토한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최근에 청와대가 부정적인 입장을 낸 것으로 알려지면서 통과에 기약이 없는 상태다. 최근 KDI가 경제전문가 489명을 상대로 일본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의 규제개혁 수준을 묻자 무려 77.9%가 저조하다고 답했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있다.

강인수 전 현대경제연구원장은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해 거창한 구호들은 많이 나오고 있지만 실제 움직임은 안 보인다”며 “개인정보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분야의 규제 완화는 사회적 논의라도 시작해야 할 텐데 그런 노력조차 없다”고 꼬집었다. 이어 “미래 먹거리 발굴은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라는 의식을 갖고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종=서민준기자 morando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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