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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성림문화재연구원은 23일 경북 경산 하양지구 택지개발사업부지 내 하양읍 도리리 115-5번지 일원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원삼국시대인 1세기 전후의 목관묘 6기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가장 규모가 큰 목관묘 6호의 묘광(목관이 안치된 곳)은 길이 311㎝, 너비 147㎝로 조사됐고, 목관의 크기는 길이 260㎝, 너비 102㎝으로 밝혀졌다. 목관은 통나무의 속을 파고, 목관의 마구리는 판재를 끼워 마감했다. 목관의 측판부에는 철부를 같은 간격으로 3개씩 박아 넣었다.
목관 묘안에는 피장자의 두개골과 팔뼈, 정강이뼈가 확인됐다. 또한 목관 내외부에는 청동거울, 철검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됐다. 특히 함께 발굴된 부채 3점은 이 무덤의 주인이 상류층임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로 판단된다. 부채 한점은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나머지 두 점은 허리춤에서 발견돼 시신의 양 손의 쥐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시신의 얼굴을 가린 부채는 청원 다호리, 성주 예산리, 경산 압량면 등지의 목관묘에서 1~2점이 나왔으나 한꺼번에 3점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일부 언론에서 보도한 압독국 왕의 무덤이라는 발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발굴에 참여한 성림문화재연구원 관계자는 “이번에 무덤이 발굴된 하양 일대는 기존 압독국의 영역으로 알려진 임당동 고분군과 10㎞정도 차이가 있다”며 “진한의 고위층 고분으로 볼 수는 있겠으나, 압독국이라고 특징지을 증거가 전혀 없는 상황”이라 의견을 밝혔다.
주보돈 경북대 교수 역시 “그 시기 하양읍 일대가 압독국의 일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며 “경산 평야지대가 넓은데, 하양은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원래 압독국의 영역으로 알려진 임당동 지역의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이 두지역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주 교수는 이어 “지역의 실체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큰 규모의 목관묘 자료가 나온만큼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나 이 무덤의 영역을 압독국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판단이다”고 말했다.
왕릉급이라는 평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당시 최고 권력자의 무덤은 맞지만, 왕은 성립되지 않은 고대도시국가의 무덤인 만큼 왕릉급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주보돈 경북대 교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왕릉의 왕과는 전혀 다른 개념”이라며 “개국 초기 도시국가에 가깝던 신라가 왕이 아닌 거사간이라는 칭호를 쓴 것 처럼, 압독국 역시 거수라는 고유의 칭호를 썼다”고 밝혔다.
한편 조사 구역에서는 고대 목관묘 외에도 청동기시대 주거지 50여기와 환호(도랑 겸 마을 경계시설), 초기 철기시대 옹관묘와 함정 유구 등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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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탁기자 ta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