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38>청전 이상범 '조(朝)']졸졸 흐르는 개울..손흔드는 나뭇잎...고단한 농부의 삶을 위로하다

근경·중경·원경 3단 구성 산수화 탈피
근경·원경으로 나뉘는 2단 구성 개척
먹선 흔적 남기는 부벽준도 자유자재
수묵담채화에 입체감 절묘하게 드러내
청초하고 고아한 한국적 정서에 집착
인생 후반기엔 노송의 솔잎 주로 그려

이상범 ‘조’ 1954년작, 69.3x274cm 화선지에 수묵담채화.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동이 채 터오기도 전인 이른 아침, 농부 부부는 일을 하러 나선다. 이들의 일터는 자연이다. 일이라는 게 해도 해도 끝이 없건만 아득함으로 여겨지기보다는 넉넉한 땅의 품 안이 가난해도 아늑할 따름이다. 지게 멘 허리가 휘고 머리에 바구니 짊어진 목이 뻐근해도, 그래도 고향 땅을 지키는 이유다. 졸졸 흐르는 개울이, 착착 줄지어 순응하는 풀무더기가, 손 흔드는 나뭇잎이 이들을 응원한다.

한국적 산수의 전형을 이룬 청전 이상범(1897~1972)의 1954년작 ‘조(朝)’는 이른바 ‘청전양식(靑田樣式)’의 전형을 보여준다. 야산, 수목, 농부는 근대 한국화의 거장인 이상범이 즐겨 그린 소재로 향토색 짙은 풍경을 이룬다. 야트막한 야산은 산이라고 하기에는 나직하고 논과 밭을 곁에 두고 있지만 들판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야말로 한국의 산이다. 풍수로 치면 동네를 품은 안산이요, 눈뜨면 늘 보이는 앞산이다. 중국의 화풍을 좇아 그리던 시절을 지나 우리 화가들이 우리 자연에 관심을 가지고 그리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겸재 정선부터다. 정선과 그 주변의 화가들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한국의 명산을 찾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진경산수’를 낳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중국의 자연과 내 발로 딛고 걸어본 우리 자연은 감동이 달랐고 감흥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산세가 수려하고 아름다운 격을 갖춘 명산만 찾아다녔지 동네 범부들의 삶터나 논밭 붙은 앞산은 눈에 들어올 새가 없었다. 이른바 ‘실경산수’라 불리는 일상의 자연이 화폭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근대기에 이르러서였고 그 중심에 청전 이상범이 있었다.
이상범 ‘초동’ 1926년작, 152x182cm 화선지에 수묵담채화.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아침을 뜻하는 ‘조’는 낮은 야산을 가로로 길게 펼쳐놓아 폭 275㎝가 넘는 대작이다. 물기가 없는 붓을 비벼서 갈필로 표현한 칼칼한 나뭇잎 사이로 아침나절의 조금 쌀쌀한 바람이 느껴진다. 전통 산수화가 근경·중경·원경의 3단 구성이 대부분이었는데 청전은 근경과 원경으로 나뉘는 2단 구성을 개척했다. 근경의 대지와 원경의 하늘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그 사잇길로 아무도 밟지 않은 이슬 맺힌 새벽길이 펼쳐진다. 그 촉촉한 길을 옷자락 펄럭이며 종종걸음쳐 일하러 나가는 농부의 고단함을 화가는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풍경으로 끌어올렸다. 국내 동양화 ‘4대가’ 혹은 ‘6대가’로 꼽히는 청전의 인기가 예전 만은 못하다지만 이와 비슷한 크기의 1957년작 ‘영막모연’이 지난해 서울옥션 경매에서 3억4,000만원에 낙찰되는 등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상범 ‘실경산수’ 1947년작, 133.3x66.7cm 한지에 수묵담채화.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상범은 1897년 충남 공주의 이름 모를 벽촌에서 태어났다. 돌도 지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열 살 즈음해 홀어머니가 자식들을 이끌고 상경했다. 형편이 빠듯했지만 공부하고 싶다는 막내의 바람을 꺾지 않은 어머니 덕에 계동보통학교를 졸업했지만 상급학교를 진학하기는 어려웠다. 마침 ‘돈 안 드는 학교’라 해서 찾아간 곳이 서화미술회였다. 조선 왕실의 재정지원을 받은 서화미술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학교였고 도화서 마지막 화원인 소림 조석진, 심전 안중식이 교수진으로 있었다. 멋모르고 찾아간 이상범은 묵국(墨菊)을 따라 그려보라는 현장 즉흥시험에 단번에 합격하면서 자신도 미처 몰랐던 재능을 감지하며 화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스승인 심전 안중식(1861~1919)은 이상범과 노수현(1899~1978)을 수제자로 두고 아꼈다. 심전은 가난한 두 청년이 집 걱정 않고 그림만 그리라며 자신의 화실 아래채를 내줬는가 하면 자신의 호를 나눠 노수현에게는 심산, 이상범에게는 청전이라는 이름으로 주기도 했다.

가난했던 이상범은 결혼을 하고도 7년간 아내를 수원의 처가에 두고 ‘기러기 남편’ 생활을 했다. 어렵게 서울에 단칸방을 마련했건만 유일한 패물인 은가락지와 은비녀까지 전당포에 맡겨가며 남편 뒷바라지를 한 아내는 1926년 남편의 등단을 목전에 두고 불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청전이 눈물 속에 그린 그림은 당시 최고 권위의 전국규모 공모전인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의 특선을 거머쥐었고 이후 내리 10년을 입상하며 ‘미술계의 춘원 이광수’라는 찬사를 받는다. 상금과 이후 팔린 그림값으로 집 한 채를 마련했을 정도다.
이상범 ‘추경’ 1930년작, 123x46.6cm 종이에 수묵담채화.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이후 신문사에 미술기자로 재직한 이상범은 삽화와 도안, 사진 수정 등의 일을 맡는다. 그 유명한 ‘일장기 말소사건’이 그 시절의 일이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조선 청년 손기정의 1등 소식이 전해지자 동아일보 체육부의 이길용 기자가 청전에게 나직이 말했다. 손기정 선수의 사진에서 앞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릴 수 없겠느냐는 심각한 부탁이었다. 다음날 지면에 일장기 없는 손기정 선수의 사진이 실렸고 당장 형사가 찾아들었다. 이길용 기자는 물론 청전도 꼬박 40일간 경찰에 붙잡혀 협박과 고문을 당했고 “다시는 신문사에서 일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서야 풀려났다.


당시의 고초가 극심했던지 청전의 이후 행보는 친일로 기울어 안타까움으로 꼽힌다. 이미 관전(官展)으로 명성을 쌓은 데다 일제를 위한 국방헌금 모금 전시에 참여했고, 결정적으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나팔수’라는 제목으로 일장기 아래서 나팔 부는 병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상범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하지만 화가로서, 그를 빼고서는 근대 한국화단을 설명할 수가 없는 일을 어쩌겠는가. 이상범이 1933년 종로구 누하동 집에 마련한 청전화숙은 일종의 미술학원으로 문하생들을 배출했다. 도시형 한옥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이곳은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인정돼 2005년 서울시 등록문화제 제171호로 지정됐다. ‘황량미(荒凉美)’라 불리는 청전의 화풍은 첫 제자 배렴(1908~1963)을 필두로 뻗어 나갔고 마지막 무릎제자인 석철주 추계예대 명예교수에 이르러서는 현대적 화풍의 동양화로 구현됐다.

이상범은 한국화의 전통 준법인 미점(米點)을 활용해 마치 쌀알을 수북이 쌓듯 점을 찍어 수묵의 미묘한 변화를 드러냈다. 도끼 찍은 자리처럼 먹선의 흔적을 남기는 부벽준도 자유자재로 사용해 수묵화이면서 입체감을 절묘하게 드러냈다. 멀리 보이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도, 꼭대기 부분은 짙게 강조하고 아랫부분은 옅어지다 못해 과감하게 생략하기도 했다.

또 하나 특징은 산 중턱, 마을 어귀에 자리 잡은 초가집이다.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을 통해 이상범은 고향에 대한 애착과 조국의 산하에서 살아가는 촌부들에 대한 사랑을 그렸다. 결핍에서 태어난 이상향인 셈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청전 자신에게 사무쳤다.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홀어머니와 함께 떠나온 고향을 두 번 다시 가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평생을 도시에서, 산업이 급성장하는 근대화를 목격하며 살았던 그는 그리워하면서도 가 보지 못한 고향을 꿈속에서 되짚으며 그 기억의 조각들로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을 자주 보는 사람의 즐거움이라면 이상범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산수화를 번갈아 보며 한국의 독특한 계절감을 음미하는 재미를 놓칠 수 없다. 봄 풍경은 은은한 색감으로 돋아나는 생명력을 탁월하게 보여줬고, 여름은 습기 머금은 푸른 먹을 사용해 수묵을 한층 맛깔나게 표현했다. 가을 풍경은 힘 있는 필선들이 도드라지는 갈색 톤이면서도 까칠까칠한 느낌이 나는 반면 겨울은 설경으로 주로 그렸다. 춘하추동 사계를 고루 그렸지만 이상범은 “나에게는 한국적인 정서와 향토적인 것에 무척 집착이 있었다… 특히 청초하고 고아한 한국의 가을은 내가 가장 사랑하고 즐긴 풍경”이라고 말했고 말년에는 특히 여름 풍경을 많이 남겼다. 노환이 발병한 이후에는 노송의 힘주어 뻗은 솔잎에 천착해 마지막까지 붓을 놓지 않은 ‘천생 화가’이자 ‘평생 화가’였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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