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심사정 ‘오상고절’ 1762년경, 종이에 수묵담채화, 38.4x27.4cm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매화는 눈 속에서 꽃망울을 터뜨려 찬바람에 그 향기를 실어 보내고, 난초는 척박한 돌 틈에서 뿌리내려 곧은 꽃대의 맑고 그윽한 향으로 주변을 가득 채운다. 국화는 서리 친 가을에 홀로 피어 추운 겨울을 견뎌내며, 대는 마음을 비우듯 속이 비었으되 단단하고 꼿꼿하게 자라 불굴을 상징한다. 이들 매난국죽(梅蘭菊竹)을 일찍이 군자의 표상으로 칭송하는 이유다.
그중에서도 국화는 서리 치는 늦가을, 다른 꽃들이 다 시들어갈 때 거만하고 고고하게 꽃을 피운다 하여 ‘오상고절(傲霜孤節)’로 불린다. 추위를 이겨내듯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자신의 본분을 지켜내는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대나무·매화·난초 그림이 송(宋)나라 때 이미 양식적 기틀을 갖춘 것과 달리 국화는 조금 늦은 명(明) 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사군자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여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국화그림이 등장한다.
현재(玄齋) 심사정(1707~1769)의 ‘오상고절’은 서릿발 속에서 고개 든 국화의 외로운 절개를 보여주는 최고의 묵국(墨菊) 중 하나다. 오른쪽에 바위를 두고 그보다 더 큰 국화가 꽃을 피웠다. 바위는 변치 않는다는 점에서 국화와 짝을 이룬다. 국화 앞쪽으로 뾰족이 솟은 식물은 ‘바랭이’라는 잡풀이다. 바랭이는 추위가 닥치기 무섭게 금방 시들고 마는 잡초라 국화의 절개와 대조를 이룬다. 마치 난 그림에서 미끈한 난잎 옆에 날카로운 가시나무를 그려 그 포악함이 난초의 부드럽지만 강한 기세를 돋보이게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의 구성이다.
물기를 담뿍 머금은 흥건한 붓질로 화가는 단숨에 국화 꽃잎들을 그려냈다. 윤곽선도 없이 몰골법으로 거침없이 그려 나간 국화에서 그간 기울인 공력이 느껴진다. 번짐이 많은 축축한 필치에서 통통한 국화 꽃잎이 만져지는 듯할 뿐, 꾸밈도 기교도 없이 담백하고 소탈하다. 흉내 낼 수 없는 멋이요, 곱씹어야 느껴질 맛이다. 그림 소장처인 간송미술관에서 숱하게 이 작품을 연구한 백인산 학예실장이 “수없이 가슴으로 느끼고, 수없이 머리로 생각하고, 수없이 그려 봤을 것”이라고 하는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옅은 붉은빛 담채도 손 가는 대로 툭툭 던지듯 칠한 것 같지만 그 속에서 시(詩)가 느껴진다.
그림의 윗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낸 듯한 구도 속에 국화꽃이 바위보다도 훨씬 크게 표현된 점이 인상적이다.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봐야 할 이 그림은 어쩌면 뼈아픈 고독의 삶을 살았던 심사정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추위만큼이나 냉랭한 세파 속에서 그는 나 홀로 견뎌야 했고 그 외로움을 그림으로 달래야 했기 때문이다.
심사정 ‘설중탐매도’ 비단에 수묵채색화, 115x50.5cm /국립중앙박물관
1707년 태어난 심사정의 청송 심씨 가문은 대대로 학덕과 지조를 갖춘 선비와 관료를 배출하고 왕실과도 혼인하는 명문 집안이었다. 시서화(詩書畵)에 고루 능한 것이 사대부의 덕목이었기에 집안 친지들 대부분이 그림에 뛰어난 문인화가였고, 심사정 또한 서너 살 무렵 스스로 깨치듯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심사정은 태어나면서부터 기구한 선비의 일생이 예고됐다. 그의 할아버지 심익창이 관직에 있던 1699년 과거부정 사건인 기묘과옥(己卯科獄)에 연루돼 유배 중이었기 때문이다. 과거부정 사건은 특히 숙종 시대에 많이 일어나 큰 골칫거리였고 국가의 기본을 유린하는 대죄로 취급됐다. 그런데 유배에서 풀려난 할아버지가 소론 과격파와 공모해 왕세자로 있던 영조를 시해하려다 실패했다. 영조는 1724년 즉위하자마자 이 사건에 관계된 사람들을 모두 역모죄로 다스렸다. 결국 심사정의 가문은 역적의 후손으로 낙인찍혀 사대부 사회에서 밀려난 것은 물론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덜 여문 그가 감당하기는 어려운 풍파였고 유일한 위안처가 그림이었다.
몇몇 기록에는 심사정이 어릴 적에 겸재 정선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전한다. 이를 근거로 겸재와 현재의 사제관계를 짐작할 수 있지만 심사정 집안이 역모에 연루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면 교류가 채 5년도 안 된 듯하다. 다만 심사정이 그린 ‘금강산도’에서 정선의 화풍이 엿보여 그들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니 다른 문인화가들이 한가한 때 취미 삼아 여흥으로 그림을 그린 것과 달리 심사정은 오로지 그림에만 전념했고 때로는 생계를 위해 팔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42세 때 영조 어진을 제작하기 위한 영정모사도감에 선비화가로 추천돼 인생의 전환점을 만나나 싶었다. 하지만 “역모죄인의 손자를 국가 중요 행사에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올라와 5일 만에 내쫓긴다. 역적의 후손이라는 자신의 처지 때문에 남들과 활발히 교류하기도 어려웠고 여행도 금강산과 대흥산성을 구경하고 온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집 가까운 북한산도 못 가봤을 정도로 세상의 눈총이 따가웠다. 심사정과 같은 시대를 산 이가환이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 같은 사람”이라고 했지만 실학자 이덕무는 “말은 세상과 동떨어졌으나 때 묻고 번잡한 자들과 비교하면 드높기가 하늘이나 연못과 같다”고 탈속의 경지를 간파했다.
다시 그림을 보자. 천상의 꽃인 듯 현실을 벗어난 것 같은 국화는 심사정의 척박한 일생과 소탈한 생활 속에서 꽃을 피웠다. 느껴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그렸더니 신선의 손놀림인 듯 그림이 된, 이때 그의 나이 55세. ‘오상고절’은 표암 강세황(1713~1791)과 함께 꾸민 ‘표현양선생연화첩’에 수록돼 있다.
심사정 ‘화조도’ 종이에 수묵화, 136.4x58.2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은 외부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지는 못했으나 집안의 예술적 아취가 높았고 선조들이 외교사절로 청나라에 자주 왕래하며 쌓아둔 책과 그림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이에 17세기부터 조선에 전해지기 시작한 남종화풍과 문인화풍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명말청초에 간행된 ‘고씨화보’와 ‘개자원화전’ 등 화보를 통해 산수화와 화조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화보를 모사한 것을 두고 지금의 기준으로 ‘베껴 그리기’로 봐서는 안 된다. 이는 학습인 동시에 수양이었고 모방을 통한 자기화의 과정은 창조의 출발점이 됐다. 심사정은 이들 화보를 연구하고 당시의 화풍과 결합해 마침내 ‘조선 남종화’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일궜다.
심사정은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그의 일생을 정리한 ‘현재거사 묘지명’에는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50년간 우환이 있거나 즐겁거나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몸이 불편하여 보기에 딱한 때도 물감을 다루면서, 궁핍하고 천대받는 쓰라림이나 모욕을 받는 두려움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그래서 지금 전하는 그의 작품은 백여 점이 넘는다. 금강산 그림도 많이 그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심사정의 금강산도가 중국에까지 유통됐다”고 기록돼 있을 정도다. 옛 화법을 충실히 계승한 것 못지않게 새로운 화풍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붓 대신 손가락을 사용해 그린 지두화(指頭畵)를 개척해 산이나 언덕을 손톱과 손가락 끝을 이용해 날카로우면서도 담백한 선으로 그리는 등 실력을 뽐냈다. 당시 감식가들은 그의 그림을 두고 “아치와 운치, 고상함이 있으며 우리나라 천 년간에 제일”이라고 평가했다. 겸재 정선이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진경산수를 이뤄 추앙받는 것과 달리 현재 심사정은 중국을 받아들인 ‘국제파’로서 우아하고 부드러운 솜씨가 대조를 이룬다.
한평생 그림에만 매달린 심사정의 ‘최후의 걸작’은 세상을 떠나기 8개월 전에 완성한 총 길이 818㎝의 ‘촉잔도권’이다. 지금의 중국 사천지방인 촉(蜀)나라로 향하는 변화무쌍하고도 긴 여정이 펼쳐진다. 인생 뒤안길에 놓인 화가가 자신의 모든 필치와 기법을 쏟아 부은 그림에서 아름다우면서도 우수 어린 서정성이 느껴진다. 독립운동가로 예술운동에도 힘쓴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안견의 ‘몽유도원도’나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보다 낫다”고 극찬한 명작이다. 간송 전형필은 구한말 매물로 나온 이 그림을 당시 큰 기와집 다섯 채 값인 거금 5,000원에 사들였고 바스러질 듯 훼손된 것을 일본에서 수리해 다시 표구하는 데만 6,000원을 들였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외에 국립중앙박물관도 심사정의 작품을 상당수 소장하고 있다. ‘설중탐매도’는 한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시인으로 살며 은거한 당나라 맹호연의 일화를 담고 있다. 이른 봄날 눈이 채 녹지도 않은 산으로 들어가 매화를 찾아다니는 그의 모습에서 엄동설한과 싸우며 고고하게 핀 국화와 매화가 겹쳐진다. 겨울을 함께 견딜 벗으로 삼기에 손색없는 그림들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