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희 전 워커힐미술관장 타계 20주기 ‘기억’전 전경. /사진제공=우란문화재단
르네상스 시대 메디치 가문을 필두로 미술계에서 후원자들의 역할은 지대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2004년 개관한 삼성미술관 리움이 미술계 후원의 대표주자지만 그보다 앞서 1990년대에는 대우재단이 설립한 아트선재센터가 있었고 그보다 더 앞서 80년대에는 워커힐미술관이 현대미술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지금은 잊혀지다시피 한 워커힐미술관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모친인 우란(友蘭) 박계희(1935~1997) 여사가 1984년에 개관해 타계 직전까지 14년 동안 총 138회의 전시를 연 곳으로 한국 현대미술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곳이다. 개관전으로 전후(戰後) 한국현대미술의 실험정신을 되돌아 본 ‘60년대 한국 현대미술-엥포르멜(Informel)과 그 주변’을 열어 주목받지 못한 한국미술을 재조명했고, 한국 최초로 미국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개인전을 개최하고 최초의 남미 예술 기획전을 연 곳이 바로 워커힐미술관이었다.
최 회장은 박계희 전 관장 20주기를 추모하며 지난달 29일 조촐한 기념전인 ‘기억’전을 미술관의 전신인 워커힐호텔 아트홀에서 시작해 오는 5일까지 개최한다. 최 회장은 “오랫동안 미술을 사랑하는 애호가이셨던 어머니는 많은 사람들과 좋은 미술품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마음과 재능있는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발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자 미술관을 개관하셨다”면서 “1997년 타계하실 때까지 젊은 작가 초대전과 한국에 미처 소개되지 않았던 외국 작품순회전, 당시 미술계에서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진, 일러스트레이션, 섬유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시를 개최하고 무용·공연 등 다양한 분야를 보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셨다”는 말로 전시 기획의 뜻을 밝혔다. 전시 개막식에 동생인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 최기원 SK행복나눔재단 이사장 등과 함께 참석한 최 회장은 “아버님이 생전에 국가에 기여할 인재를 양성했던 것처럼 어머님은 국내 작가 발굴 등 미술계 육성에 온 힘을 다했다”면서 “40대가 돼서야 동양사 공부를 시작한 어머님은 동양화, 병풍, 도자기 등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과 수집에 열정을 보이셔서 좀 더 살아계셨다면 한학과 동양예술에 대한 열정이 빛을 발할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깝다”고 회고했다.
박계희 전 워커힐미술관장 타계 20주기 ‘기억’전 전경. /사진제공=우란문화재단
전시장 입구에 걸린 이호중 화가의 박계희 여사 초상화는 세상을 떠난 박 전 관장을 대신해 관객을 맞는다. 이 작가가 박 여사 별세 후 결혼 25주년 은혼식 사진을 토대로 그린 그림으로, 최 회장이 소장해 온 그림이다. 전시장은 이른바 ‘워커힐미술관 컬렉션’ 중 엄선한 90여 점이 채우고 있다. 지금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개인전 등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는 고암 이응노의 그림은 물론 한국 아방가르드미술 1세대 작가인 김구림, 단색화 대표작가인 권영우·박서보·정창섭 등의 전성기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백남준·유영국·이성자·남관·문신 등 전시된 작품들 만으로도 한국의 현대미술사를 꿸 수 있을 정도다.해외작가 작품도 눈부시다. 워커힐미술관은 앤디 워홀 외에도 아르망, 베티 골드, 피에르 알레친스키, 데니스 오펜하임, 안토니 카로, 케테 콜비츠, 루이스 부르주아 등 세계적인 미술가들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전시장에서는 데이비드 호크니, A.R펭크, 로이 리히텐슈타인, 솔 르윗, 프랭크 스텔라, 클라스 올덴버그, 필립 거스턴 등의 수작을 만날 수 있어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단비같은 자리다.
박 전 관장 타계 후 큰며느리인 노소영 씨가 2000년 말 ‘아트센터 나비’를 개관하면서 미디어아트 등 기술과 접목한 첨단예술에 집중하면서 워커힐미술관은 기억에서 흐릿해졌다. 이번 20주기 전시를 계기로 800점 이상으로 추산되는 명품 소장품의 활용방안이 미술계의 기대를 모은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