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눈치보는 장수 CEO

송종호 증권부 기자

결국 무릎을 꿇었다. “현 정부와 결이 안 맞다”는 황영기 금투협회장의 발언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겪었던 그의 마음고생이 오롯이 전해진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대기업 그룹에 속한 회원사 출신이 (출신 회사의) 후원이나 도움을 받아 회장에 선임된 경우가 많았다. 또 (그런 인사가) 나타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발언한 지 5일 만에 황 회장은 항복선언을 했다. ★본지 5일자 1·10면 참조

최 위원장의 작심발언은 하나 더 있다. “경쟁이 가능하거나 유력한 경쟁자를 인사 조치해 주변에 ‘대안이 없다’는 식으로 연임 분위기를 조성한 게 사실이라면 최고경영자(CEO)로서 중대한 책무 유기”라고도 했다. 연임이 확실시되는 김정태 하나금융지주 회장을 두고 한 말이라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지만 이를 듣고 있는 금융투자업계의 심경은 복잡하다.


단기 재임 CEO 문제가 늘 증권업 발전의 장애요인으로 꼽히는 와중에 금융수장이 연임에 부정적인 입장을 내놓았으니 장수 CEO 타이틀을 달고 있는 증권사 사장들은 ‘뜨끔’할 수밖에 없다. 장수 CEO가 단기 재임보다 자기자본 확대와 인력 확충 등 장기 경영활동에 보다 더 적극적이라는 자본시장연구원의 조사도 ‘머쓱’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올해 말과 내년 초 임기만료를 앞둔 국내 증권사 CEO는 10개사 11명이나 된다. 대놓고 연임 의지를 피력했다가는 11명 모두 ‘책무 유기자’로 몰릴 형편이다. 한마디로 적폐가 된다.

금융투자협회장 재선 문제도 마찬가지다. 금투협 회장 선거는 각종 협회장 선출에 있어서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꼽힌다. 관피아(관료출신), 정피아(정계출신), 학피아(학계출신)가 주름잡는 협회장 선출에서 회원사의 투표로 회장을 선출하는 유일무이한 곳이 금투협이다. 대부분 청와대의 낙점을 받거나 유력 정치인의 후광을 얻는 경우가 많은 형편에 금투협은 3대 회장인 황영기 회장도 뜻밖의 선출로 화제가 됐을 정도다. 그가 직접 현안을 챙긴 핵심과제만도 100가지다.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일부에서는 최 위원장이 금융투자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구두 인사개입에 나선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황 회장의 연임 포기가 알려지자 주요 증권사 CEO는 “정권 눈치 보며 일할 사람이 협회장에 나오게 생겼다”고 입을 모았다. 선거 출마했다가 ‘구두 인사 개입’으로 후보등록도 못 해보고 낙마할 가능성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과거 임종룡 전 금융위원장은 “장기 연임하는 CEO의 탄생이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증권사들의 발전전략이 수립되는 시작이 돼야 한다”며 최장수 CEO 탄생을 축하한 바 있다. 정권이 바뀌면 전 정부를 부정하는 게 공무원의 일이라지만 선배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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