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식량원조국



1960년대까지만 해도 쌀은 귀했다. 보릿고개로 끼니를 걱정하던 시절 한 줌의 쌀을 옥수수와 함께 갈아 쑨 강냉이죽으로 한 끼를 해결했다. 술을 빚고 남은 술지게미로 허기를 달래다 술에 취해 뒤탈이 나기도 했다. 전후 복구를 위해 미국의 식량원조가 시작되면서 그나마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었다. 미국은 잉여 농산물을 소진하기 위해 밀가루와 옥수수·설탕·가루우유 등의 기초 식량을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에 무상으로 제공했다.


50대 이상 중장년층에게는 초등학교 때 먹은 옥수수빵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 트럭째 실려와 양동이에 담아 선생님이 나눠준 그 딱딱한 빵이 왜 그리도 맛있던지. 물만 빼고 식재료는 죄다 원조물자다. 당시 미국산 밀이 얼마나 많이 들어왔던지 국내 농산물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적도 있었다. 삼양식품이 원조 밀가루를 이용해 라면을 처음 만든 것이 1963년이었다. 보릿고개 고비를 넘기고도 만성 쌀 부족에 시달렸다.

통일벼의 등장으로 쌀 자급이 가능해진 1970년대 중반까지 강력한 절미(節米)정책은 국민의 식탁을 바꿔놓았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점심은 ‘무미일(無米日)’이라고 해 쌀로 만든 음식을 팔지 못하게 했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까칠한 현미를 먹지만 정부가 나락을 덜 깎도록 쌀 도정률을 9분도에서 7분도로 규제했다. 서민의 술인 막걸리 제조에 쌀 사용을 금지해 원성을 사기도 했다. 금지령은 쌀 자급을 선언한 지 2년이 지난 1977년에야 비로소 풀렸다.

정부가 제출한 ‘식량원조협약(FAC)’ 가입 동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가입 절차를 마치면 내년 중 5만톤의 쌀이 유엔 세계식량계획(WEF)을 통해 아프리카 등에 제공된다. 쌀 자급 시대를 연 지 43년 만이다. 과거에도 해외구호품으로 쌀을 보낸 적이 있지만 일회성에 그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남아도는 쌀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진작 대외원조를 모색했어야 했지만 국민 정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직도 결식아동이 적지 않고 과거의 쌀 부족 트라우마도 해외원조를 주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연간 생산량의 절반이 양곡 창고에 쌓여 있는데도 쌀은 여전히 식량 주권의 성역에 갇혀 있는 것 같다. /권구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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