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WHO-굴곡진 정치인생 룰라] 죄가 밉지 사람이 밉냐…룰라 향수를 불러오다

[룰라에 애끓는 브라질]
한때 8위 경제 대국 '황금기' 이끌어
부패혐의에도 내년 대선 지지율 1위
'테메르 우파정권' 불신도 인기 밑거름
[재판에 속타는 룰라]
항소서 져 최종형 확정 땐 정치생명 끝
'퍼주기 정책'에 경제 위기 원흉으로 꼽혀
재계·시장도 '대선 지원사격' 안 나설 듯

“내게 죄가 있다면 대선에 다시 나서겠다는 용기를 낸 것뿐입니다.”

구두닦이 출신의 세계 최고 인기 대통령에서 부정부패 혐의자로 전락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전 브라질 대통령이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퇴임 이후 7년 만에 다시 대권 도전에 나섰다. 지난 3월 대선 출마를 선언한 룰라 전 대통령은 지난 8월과 10월 두 차례의 카라반 투어로 총 5,400㎞의 유세 릴레이를 펼친 데 이어 최근 3차 투어에 돌입해 건재를 과시하며 대중적 지지를 끌어올리고 있다. 현지 여론조사에서 그의 지지율은 30%대 중반으로 2위를 큰 차이로 따돌리며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7월 부패혐의로 선고받은 10년 징역형이 확정되면 형량의 2배인 20년간 공직 취임이 금지돼 사실상 정치인생이 끝나는 것은 물론 ‘노동자 대통령’의 신화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좌파 정권의 포퓰리즘 정책 남발로 경제위기를 악화시킨 주범이라는 경계감과 호황을 그리워하는 서민들의 지지를 동시에 받고 있는 룰라. 중남미 ‘좌파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그가 정치인생의 두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걷느냐에 따라 극심한 정치혼란을 겪고 있는 브라질은 물론 내년 이후 줄줄이 선거를 앞둔 중남미 국가들의 앞날도 크게 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3일(현지시간) 브라질 여론조사 업체 다타폴랴는 대선주자 지지율 조사에서 룰라 전 대통령이 34~36%로 2위권과 배 이상의 격차를 보이며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발표했다. ‘보수의 대안’을 자처하며 룰라를 위협하는 극우성향 기독교사회당(PSC)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연방 하원의원이 17~19%의 지지율로 2위를 기록했고 미셰우 테메르 현 대통령은 1%에 그쳤다.


룰라의 인기는 그가 브라질을 뒤흔들고 있는 부패수사의 핵심에 선 인물이라는 점에서 의외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브라질 사법당국은 2014년 초부터 지금까지 약 300명을 기소하는 등 대대적인 부패수사를 벌이고 있다. 룰라는 뇌물수수·돈세탁 등의 혐의로 지난해 3월 연방검찰에 강제 연행된 후 올 7월 연방법원 1심 재판에서 징역 6년9개월을 선고받았다. 2심 재판은 내년 상반기로 예정돼 있다.

브라질 사회에서 부정부패는 정파를 막론하고 만연해 있지만 ‘국민 영웅’으로 추앙 받아온 룰라의 연루는 국민들의 배신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금속노동자 출신에서 브라질 최초의 좌파 대통령이 된 그는 “왜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 하고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비용이라고 하는가”라며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는 5,000만명의 빈민에게 적극적인 복지정책을 펴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한때 브라질을 세계 8위의 경제대국으로 올려놓으며 ‘황금기’를 이끈 룰라의 지지율은 집권 마지막 해인 2010년 무려 87%에 이르렀다.

하지만 높은 성장률을 보이던 브라질 경제가 그의 퇴임 이후 악화하며 급기야 마이너스 성장에 빠지자 룰라의 포퓰리즘 정책에 비난의 화살이 집중됐다. 월 소득의 절반 이상을 국가가 지원하는 파격적인 빈민복지 정책이 저유가 장기화로 직격탄을 맞은 브라질 경제에 부메랑이 된 것이다. 브라질 중앙은행에 따르면 10월 말 공공부채는 4조8,370억헤알(약 1,600조원)로 주요 신흥국 가운데 최고 수준에 달했다. 세계은행은 브라질이 엘리트 계층에 대한 혜택을 줄이고 재정에 과도한 부담을 주는 사회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권고했고 국제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연금개혁 등으로 과도한 공공부채 부담을 줄이지 않으면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할 수 있다고 경고한 상태다.

이 때문에 재계와 시장에서는 무분별한 퍼주기 정책을 편 룰라의 대선 출마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브라질 상파울루산업연맹 국제담당인 토마스 자노토는 “룰라는 로또 당첨 같은 상품 슈퍼사이클 덕분에 3,000만명을 중산층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면서 “모두가 슈퍼사이클이 계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룰라에게 개혁을 요구했지만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시장에서는 룰라가 내년 대선에서 승리할 경우 브라질에 투자한 자산이 대규모로 이탈할 것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슈로더자산관리의 앨런 아이어스 포트폴리오매니저는 “만일 룰라가 승리한다면 브라질에는 매우 부정적”이라며 “이는 분명히 브라질 자산 매도로 이어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룰라가 내년 대선에 나올 수 있을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항소과정을 거쳐 최종형이 확정되면 내년 대선에 출마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약 20년간 공직 취임이 금지돼 정치생명도 끝나게 된다. 하지만 룰라는 검찰 조사를 ‘마녀사냥’으로 치부하며 대선 출마 의지를 드러내고 있고 브라질 대중도 룰라에 대해 여전한 지지를 보이고 있다. 룰라의 인기를 단순히 과거 영광에 대한 향수로 치부할 수도 없다. 브라질 국민들은 실용주의 좌파인 룰라의 복귀로 최악까지 치달은 정치·경제 상황이 수습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걸고 있다. 한 현지 언론은 “룰라는 행정가로서 이데올로기보다 실용성을 내세운다”며 포퓰리즘 정책의 부활이 아니라 당면과제 해결에 집중할 것으로 평가했다. 여기에 현 우파정권과 테메르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룰라의 인기를 부추기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특히 좌파를 향해 휘두르고 있는 부패수사의 칼날이 우파 정치가들에게 미치지 않으면서 브라질 국민들 사이에서는 “골수 부패세력이 부패세력을 몰아내고 있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박민주기자 parkm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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