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권력의 독점과 사회적 병폐, 동전의 양면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겉으로 보기에 권력의 독점과 사회적 병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면, 양자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기인(其人)제도를 뒀다. 기인이란 지방 유력자의 자식을 한양에서 살도록 하는 제도인데, 지방의 사정을 중앙정치에 반영한다는 명분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중앙이 지방의 볼모를 잡는 것이다. 이 제도는 조선 중기에 들어서 흐지부지되는데, 그 이유는 경제파탄으로 나라의 곳간이 비어 전국 각 지방에서 온 기인들을 먹이고 재우며 관리하는데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은 기인제도를 포기하고, 지방에 파견하는 관리의 처자식을 한양에서 그대로 살도록 했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출신고향에는 부임시키지 않는 상피제도를 엄격히 시행하고, 각 도에 파견되는 관찰사의 임기를 1년으로 제한했다. 그러니 지방장관격인 관찰사라고 해봤자 지방의 사정에 깜깜이라 지방의 행정은 한양과 거의 따로 놀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처자식이 모두 한양에 있다 보니 지방수령들의 생활이 외롭기 짝이 없었는데, 특히 잠자리가 허전했다. 조정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지방관아에 관비를 두고, 관비로 하여금 한양에서 온 관리들의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했다.


그렇지만 그 후에는 부산물이 문제가 됐다. 관비들이 낳은 자식들이었다. 이에 조정은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들고 나와 관비가 낳은 자식은 무조건 어미의 신분을 따르도록 했다. 그 후 지방의 관리들은 실컷 본능을 충족하면서도 사생아 걱정 없이 국정에 전념할 수 있었고, 지방관아는 국유재산인 노비를 늘릴 수 있어 좋았다. 이 정책의 입안자들은 일거양득의 제도를 창안한 공로로 벼슬이 올랐다. 수령의 아내노릇을 하는 관비나 수령의 핏줄인 관노가 실무를 담당하는 아전을 제치고 행정과 형벌, 송사를 농단하는 일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더 심각한 문제가 또 있었다. 관비들을 끼고 호령하는 벼슬아치들이 남성다운 삶의 표상이 돼 조선의 모든 남성들에게 본보기가 됐다. 그 바람에 벼슬이 올라 첩을 많이 두는 게 잘난 사내의 인생 목표가 되고, 첩이 없으면 사내대접도 못 받는 세상이 됐다.

그런데 자연의 섭리는 양반 남성들의 바람과 달리 남녀의 성비를 고르게 한다. 남성인구의 1할을 차지하는 양반 남성들이 너나없이 마누라에다 둘 셋의 첩을 두다보니 인구의 3할이 넘는 가난한 남성들은 평생 짝을 찾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서민들은 아들 장가보내는 일이 인생 최대의 숙제였다. 그런데다 여인을 바라보기만 해도 이성을 잃는 사내들이 팔도에 넘치다보니 온갖 성범죄가 만연했다. 조정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형벌을 무지 강화하고, 일벌백계를 일삼았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고 인간의 본능을 형벌로 다스리는 일이 성공할 리 없었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백성을 교화한답시고 인간의 도리와 양심을 강조하고, 성범죄자는 물론 피해를 입은 부녀자에게도 감당할 수 없는 도덕적 비난의 굴레를 씌웠다. 그 결과 조선의 여인은 정조를 잃는 것보다 도덕적 비난이 두려워 굴종하고 침묵하면서, 한을 가슴에 쌓았다. 이처럼 권력의 독점은 심각한 사회적 병폐를 낳는다. 돌이켜보면 조선의 모든 사회적 병폐는 권력의 독점에서 나왔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대증요법이란 말이 있다. 질병의 원인보다는 겉에 드러난 증상만 보고 행하는 치료법이다. 그런데 조선의 사회적 병리현상에는 대증요법조차 쓰이지 못했다. 기침을 토하는 병자에게 쉬라는 게 아니라 ‘입 털어 막고 찍소리도 내지마라’는 식이니 병이 낫기는커녕 도지기 십상이었다. 위만 바라보는 관리들의 눈에 아래의 백성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탐욕스러운 권력에 순응하고 아부하는 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자신과 이웃의 삶을 파괴하고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