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12일(현지시간)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 제의를 한 것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미국이 새로운 문을 열며 ‘공개 초대장’을 보낸 것으로 평가된다. 틸러슨 장관의 이날 발언은 기존 북핵 대응 기조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고 미 안팎의 평가를 받을 만큼 파격적이고 대담한 것으로, 그간 꾸준히 제기해온 뉴욕 채널이 어느 정도 통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제기된다.

틸러슨 장관은 이날 워싱턴DC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조건 없이 북한과 첫 만남을 갖겠다”고 밝히면서 그 진정성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을 여러 차례 덧붙였다. 그는 북측이 원한다면 날씨 얘기를 하든, 마주 앉은 테이블이 원형인지 사각인지 담소를 하든 상관없다며 ‘선(先) 대화’ 입장을 거듭 강조했다. 이는 기존에 북미 간 어떤 식의 만남이나 대화가 성사되려면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할 의지라도 보여야 한다”는 미 행정부 기조에서 크게 물러선 것이다. 틸러슨 장관은 기존 입장에 변화를 줬다는 것을 부각하듯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해야만 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대화의 문이 열리면 “어디로 나아갈지를 다룰 로드맵을 펼칠 수 있다”고 밝혀 북핵 동결 및 비핵화 논의는 조건 없는 만남이 성과를 낸 뒤 추진할 뜻을 나타냈다.


특히 틸러슨 장관은 북측이 대화에 나서려면 결국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해 “김정은은 아버지·할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르다”고 평가하며 “우리는 김정은과 대화하는 것이 어떤 것일지 모른다”고 북측 사정을 챙겼다. 북측과 대화의 최소조건으로는 추가 도발을 당분간 중지하는 ‘휴지기’를 촉구했다. 미국 측이 지난달 28일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을 발사한 데 대해 새로운 차원의 대북 제재 강화를 천명했지만 현재까지 후속 조치를 보류하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지난 10월 북측과 막후 접촉을 추진하는 모습을 보였다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시간 낭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던 틸러슨 장관이 이날 과감하게 북미 대화를 치고 나온 배경으로 ‘뉴욕 채널’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낸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미 국무부 출신인 제프리 펠트먼 유엔 사무차장은 이달 5~9일 북한을 방문한 성과를 이날 유엔에 보고하면서 “방북이 건설적이고 생산적이었다”면서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고 의미를 부여한 바 있다.

전격적인 틸러슨 장관의 대북 제안에 미 ABC방송은 “트럼프 정부의 일원으로서 놀라운 변화”라고 해석했고 CNN은 “(북핵 대응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외교로 풀자는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초대장을 북한에 보낸 것”이라고 평했다. 중국 관영 매체들은 한발 더 나아가 틸러슨의 발언에 ‘미국 양보’라는 제목을 붙여 주요 뉴스로 보도하면서 중국 당국이 높게 평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신화통신 자매지인 참고소식망은 미국이 핵무기 폐기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던 이전과는 변화된 태도를 나타냈다며 사실상 북측이 미국의 제안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도록 유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향후 북미관계의 향방은 미국의 대화 제의에 대한 북측의 반응에 따라 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일본 NHK방송은 12일 자성남 유엔주재 북한대사가 “조건이 갖춰지면 미국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뉴욕=손철특파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