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41>김규진 '총석정절경도 '금강산만물초승경도']조선의 자부심을 담다

너비 885㎝·높이 195.5㎝ 비단 7폭 대작으로
1920년 순종 접견실인 창덕궁 희정당에 걸려
바다로 나가 '수평적 시선'으로 그린 총석정
주상절리 수직구도와 어우러져 기이한 맛 더해
가을 금강산 담은 만물초는 '드론 뷰' 보는 듯

김규진 ‘총석정절경도’ 1920년, 비단에 채색, 195.5x882.5cm, 등록문화재 제240호, 창덕궁 희정당 벽화로 제작됐다.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브루클린에서 바다 건너 바라본 뉴욕 맨해튼 풍경이 딱 이랬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건물들이 그리는 화려한 스카이라인은 사람이 그릴 수 있는 가장 큰 그림임을 과시하는 듯했다. 잠시 시간을 100년 전으로 되돌려 대서양과 태평양을 넘어 강원도 동해안으로 가보자. 총석정이다. 강원도 통천군 해안가에 자리 잡은 정자 이름이지만 절벽을 따라 병풍처럼 빽빽하게 늘어선 현무암 돌기둥 일대를 통칭해 총석정이라 부른다. 지금은 북한 땅이라 가볼 수 없어 더 안달 난다. 관동팔경 중 하나인 명승지로 꼽히며, 총석정이 빠지면 관동팔경 전체가 의미 없다 하여 금강산 여행의 초입이건 다 돌아보고 나오는 길이건 빼먹지 않고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니 겸재 정선부터 단원 김홍도까지 붓 좀 휘두르고 그림깨나 그린다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곳으로 달려갔다. 정선은 총석의 돌기둥을 앞에 두고 뒤로 너른 바다를 그렸고 김홍도는 총석의 측면을 바라보면서 양옆에 바다를 배치했다. 그러나 이처럼 배 타고 바다로 나가 육지 쪽을 바라보며 ‘수평적 시선’으로 총석정을 그린 이는 해강 김규진(1868~1933)이 처음이었다. 파격적이다. 야경을 밝히는 불빛처럼 주상절리 끝에 초록빛 보석이 반짝인다. 전통 청록산수화에서는 이끼 태(苔) 자를 써서 ‘태점’이라 부른다. 바위나 나무 표면을 그릴 때 으레 반드시 찍어야 하는 관습적인 요소인데, 이렇게 아름다울라 치면 이끼도 에메랄드 아닌가 싶다.

1920년 창덕궁 희정당에 걸린 이 웅장한 대작은 조선의 마지막 궁중장식화로 통한다. 희정당 대청 양쪽의 동·서 침실 문 윗부분을 벽화처럼 장식할 요량으로 너비 약 885㎝, 높이 195.5㎝로 비단 7폭에 그려진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들이다. 그려질 당시 창덕궁의 주인은 순종(1874~1926)이었다. 고종은 덕수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했지만 을사늑약 이후 1907년에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말이 ‘마지막 황제’이지 일체 치하의 허울뿐인 왕이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통치권을 빼앗기고 ‘이왕(李王)’으로 낮춰 불린 그에게 희정당은 집무실이 아니라 접견실이었다. 설상가상 1917년 11월에 창덕궁 대조전에 불이 나 내전 일대 건물들이 다 타버렸다. 김규진이 참여한 일련의 벽화작업은 화재 후 재건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허수아비 같은 왕이지만 일제는 극진히 모신다는 점을 과시하고 싶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거대한 저항의 힘을 겪어본 일본인들이 겉으로나마 우리 문화를 존중하는 척 민심을 무마하려 했던 성싶다. 1920년 6월2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희정당 벽화 작업에 관해 “조선 사람의 미술을 숭상하며 겸하여 전하의 평생 애호하시는 본지에 어김이 없고자” 한 것이라 적혀있다.

빼어난 작품이라 해도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그림은 단연 ‘일월오봉도’다. 다섯 개의 산봉우리 위로 해와 달을 띄우고 소나무와 물을 그려 자연에 빗댄 영원불변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그림 말이다. 왕의 집무공간에 남쪽을 향해 어좌가 놓이면 그 뒤는 항상 일월오봉도 병풍이 감싸곤 했다. 통치권을 상실한 순종에게 왕의 권위를 추켜세울 그림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저 위엄이 빠져나간 자리를 꾸밀 ‘장식 그림’이면 족하다는 것이 순종의 뜻이었는지, 일제의 의도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나랏일 살피는 왕을 따라다니며 옹립하던 병풍 대신 창덕궁의 화려한 접견실을 지키던 박제된 왕 순종을 위한 과시용 벽화가 바깥사람들의 눈을 끌기에는 더없이 효과적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보물 제815호로 지정된 창덕궁 희정당 내부. 순종의 접견실로 동서 양쪽 벽에 해강 김규진이 그린 ‘총석정절경도’(오른쪽)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가 벽화형식으로 제작돼 걸렸다. 지금은 보존 수복작업으로 원본 대신 모사본이 걸려있다. /사진제공=문화재청

일제는 창덕궁 벽화 작업의 촉탁을 알리며 희정당은 ‘조선 풍경화’로 꾸미겠다고 공고했고 김규진이 뽑혔다. 열여덟 살에 중국으로 건너가 8년간 북경을 비롯한 중국 옛 왕조들의 수도를 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새로운 기운을 경험하고 온 그다. 붓 쓰는 일이라면 글, 그림 할 것 없이 탁월했던 이라 대한제국 궁내부 관리로 일하며 고종황제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의 서법 선생을 맡았다. ‘군상’과 ‘문자추상’으로 유럽에까지 이름을 날린 이응노가 그의 문하생이었다. 일본에서 배워온 사진술로 고종의 사진도 찍었으니 옛날로 치면 어진(御眞) 화가로 벼슬을 받았음 직한 인물이다. 1905년 김규진이 촬영한 고종황제의 초상사진은 현재 미국 뉴어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1907년에는 국내 최초의 사진관인 ‘천연당 사진관’을 열었고 근대적 개념의 화랑인 ‘고금서화관’도 운영하며 휘화나 현판의 글씨, 그림 등에 값을 매겨 주문 제작하기도 한 ‘조선판 다빈치’였다. 김규진의 평생 역작은 단연 이 희정당 벽화이나 대중적으로는 먹으로 그린 묵죽과 묵란이 인기였다.


빼어난 실력에 황실과의 인연도 깊었던 김규진은 벽화 작업을 맡고 금강산을 소재로 ‘총석정절경도’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를 그렸다. 금강산이 어떤 산인가. 한반도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온 백두대간이 반도의 중간 즈음에서 다시 한 번 허리를 일으킨 지점이다. 특히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그리며 중국과는 또 다른 우리 문화의 자의식을 깨우던 시기에 금강산은 민족적 자부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세조와 정조 등 예술에 조예 깊었던 왕들이 화원을 파견해 금강산을 그려오라 명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금강산이 왕실회화로 그려졌던 일은 없었다. 이홍주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금강산이라는 주제를 누가 결정한 것인지는 기록을 찾지 못했으나 일본인들이 조선문화에 대한 존중을 보이며 민심을 잠재우려는 목적으로 민족의 정기가 서린 금강산을 채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면서도 “당시 일제가 철도를 놓으며 금강산을 관광지로 개발하던 시기라는 점 또한 무시할 수 없기에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그림을 보자. 새카만 현무암 주상절리를 찰싹찰싹 때리는 파도가 하얗게 부서진다. 그 앞으로 물결이 차곡차곡 펼쳐진다. 통통하게 살 오른 잉어 비늘을 닮은 물결이다. 바다의 수평선과 주상절리의 수직 구도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기이한 풍경 맛은 배가 되고 세련된 현대적 감각까지 느껴진다.

김규진은 ‘해강’이라는 호 말고도 ‘만이천봉주인’이라는 자호를 쓸 정도로 금강산을 사랑했다. 지금은 자연훼손이라며 몰매 맞을지 모를 일이나 금강산 석벽에 거대한 글씨들을 새겼고 1919년에는 ‘금강행’이라는 여행기를 ‘매일신보’에 연재했으며 단행본 형식의 여행 안내책자 ‘금강유람가’도 발간했다. 희정당 벽화를 의뢰받은 그는 한 번 더 금강산으로 가 몸풀기를 하듯 ‘해금강총석도’를 그려왔다. 총 길이 335㎝의 이 두루마리 그림은 벽화와 같은 구도이나 황포돛배에 몸을 맡긴 고승, 뱃놀이하는 사람들과 총석정 멀찍이 등 돌리고 앉은 신선 같은 이들의 모습이 풍속화처럼 들어 있어 더욱 정감 있다.
김규진 ‘금강산만물초승경도’ 1920년, 비단에 채색, 195.5x882.9cm, 등록문화재 제241호, 창덕궁 희정당 벽화로 제작됐다. /사진제공=국립고궁박물관

감탄할 그림은 이뿐 아니다. 마주 걸린 ‘금강산만물초승경도’는 강원도 고성군의 외금강을 대표하는 절경이다. 주홍빛 단풍이 스민 가을 풍악산을 담았다. 총석정이 배 타고 나가 본 장면이라면 이 만물초는 가히 ‘드론 뷰’라 할 만하다. 항공사진처럼 정지된 화면이 아니라 ‘밀당’하듯 멀리서 보고 쑤욱 다가가 보기를 번갈아 그린 역동성이 느껴진다.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세상 만물을 모두 담은 것처럼 형태가 다양하다는 뜻의 만물포다. 호랑이 등뼈 같은 빽빽한 산세를 시작으로 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은 봉우리가 차곡차곡 전개된다. 화장한 여인의 콧등처럼 산봉우리는 옅게 칠해 밝게 돋보인다. 신비로운 구름이 산 중턱에까지 내려앉아 물거품처럼 흘러넘치는 모양새가 아찔하다. 유려한 옷 주름 같은 바위틈에서 시작된 진짜 물줄기는 아래로 아래로 흘러 발밑을 적실 태세다. 봉우리를 휘감은 구름을 연기처럼 얇게 그려 그 뒤로 산이 살짝 엿보이게 한 것은 작가의 재주이자 재치라 할 만하다. 겸재가 둥그렇게 모아 그린 일만이천봉을 가로로 펼쳐놓은 파노라마 풍경인데, 다시점(多視點)을 사용해 산은 우뚝 솟았다 누웠다 기울어졌다를 거듭하며 서로 경쟁하듯 뽐낸다.

마침 이 그림을 실제로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가 왔다. 문화재청이 긴 시간 외부 노출로 훼손된 그림의 복원작업을 진행했고, 희정당 벽화 두 점은 2015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와 섬세한 수복과정을 거쳐 묵은 때를 벗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창덕궁 희정당 벽화’ 특별전이 최근 개막해 내년 3월4일까지 열린다. 보물 제815호 창덕궁 희정당 내부가 비공개 지역인 데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제대로 보일 만큼 높이 걸린 벽화라 코앞에서 가까이 보여주기는 98년 만에 처음이며 언제 다시 공개될지 모를 일이다. 비록 왕실의 전통은 약해졌으나 조선의 자부심과 일제강점기의 부침, 근대화가의 몸부림이 머릿속을 스쳐 간다. 마치 주상절리와 금강산 기암괴석이 뒤엉키듯.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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