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냉장고 ‘패밀리 허브’의 스마트홈 서비스 가상 구현 모습. /사진제공=삼성전자
우리나라는 삼성전자·LG전자·현대자동차 등에서 보듯 명실상부 제조 강국이다. 하지만 플랫폼만 놓고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1990년대 디지털 시대가 도래한 이래 국내 기업이 플랫폼을 선도한 적은 없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정보기술(IT) 역사에서 플랫폼을 장악한 기업이 시대를 호령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뼈아픈 현실이다. 실제 마이크로소프트(MS)는 윈도 플랫폼을 PC에 깐 덕에 IT 업계를 지배했고 구글은 검색과 스마트폰 플랫폼을 장악해 강철같던 MS 제국의 성벽을 허물 수 있었다.
스마트폰 최강자가 된 삼성도 지난 2012년부터 독자 플랫폼인 ‘타이젠’이라는 모바일 운영체제(OS)에 공을 들여왔다. 하지만 글로벌 모바일 시장에서 타이젠의 점유율은 1%도 안 될 만큼 미약하다. 초일류 기업도 플랫폼 기업으로 변모하기는 이처럼 어렵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포기는 이르다고 말한다. 제조 강국으로서 4차 산업혁명을 맞아 폭발 중인 인공지능(AI)·사물인터넷(IoT) 등을 접목하면 새로운 형태의 한국형 플랫폼을 만들 잠재력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전자 업계의 한 고위 임원은 “스마트폰 플랫폼 경쟁에서 졌지만 스마트 가전을 비롯해 ‘바퀴 달린 컴퓨터’라는 자동차 등 넥스트 모바일에서 반전을 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갈 길 멀지만 ‘넥스트 모바일’에서 기회 잡아야=지금까지 놓고 보면 한국만의 독자 OS는 요원하다는 표현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빅뱅에 가까운 플랫폼 혁명이 오히려 모멘텀을 제공하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최근 나오는 가전은 점점 고도화되고 있다. 사실상 컴퓨터로 진화 중이다.
삼성은 TV는 물론 냉장고·소형가전·스마트워치 등 웨어러블 기기에 자체 플랫폼인 타이젠 OS를 탑재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다른 OS를 깔 때 들어가는 라이선스 비용을 줄이고 기능도 입맛대로 활용할 여지가 생긴다. 플랫폼 전문가로 유명한 제프리 파커 미 다트머스 공대 교수도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한국이지만 제품을 판매할 뿐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하는 역할에는 등한한 측면이 있다”며 “제품에 AI 등을 결합한 새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낸다면 얼마든지 플랫폼 사업자로 변신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동차도 IT와의 접목으로 거대한 플랫폼화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무인자동차의 경우 동력은 전기차, 운영방식은 공유 비즈니스 등으로 구현될 수 있어 플랫폼 간 융복합이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제조업체 입장에서는 OS나 린치핀 성격을 갖는 특정 부품의 중요성이 더 커져 이종업체와 협력을 통해 이에 대비해야 한다. 삼성전자가 하만 인수로 전장과 오디오 사업을 강화하면서 연평균 9%씩 커가는 커넥티드카 시장에서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좋은 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세계 1위 비메모리 반도체 회사인 인텔이 데이터 분석 능력을 무기로 BMW·델파이·에릭슨 등과 손잡고 자율주행차를 선보였다”며 “스마트폰 시장 진출 기회를 놓쳤던 인텔이 차세대 모바일 트렌드인 자율주행차에서는 뒤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고 진단했다.
고객이 가전기기 간에 연결된 스마트홈을 체험하고 있다. /사진제공=LG전자
이런 플랫폼에 수집된 데이터의 비즈니스 활용은 확산 추세다. 가령 차가 보유한 데이터나 웨어러블 기기가 파악한 신체정보는 다양한 보험 상품의 보험료 산정에 활용되고 있다. ◇기기 간 비호환, 보안 문제 극복해야=전문가들은 앞으로 5년 후만 돼도 모든 기기가 촘촘히 얽힌 연결에 대한 소비자 욕구가 지금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글로벌 가전 업계만 해도 스마트홈 구축은 발등의 불이다. 가전에 무선 인터넷 기능 탑재는 기본 중의 기본이고 이제는 가전기기 간 연결 매개로서 AI 플랫폼의 표준이 될 수 있느냐, 어느 AI에서도 작동 가능한 제품을 개발해내느냐가 승부처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오는 2020년 가전 전 제품에 스마트 기능을 탑재해 서로 연결한다는 목표다. 여기에는 가전뿐만 아니라 폐쇄회로(CC)TV, 웨어러블 기기 등이 모두 포함된다. 최근 삼성전자가 IoT 클라우드를 통합하는 강력한 단일 플랫폼인 ‘스마트싱스 클라우드’를 발표한 것도 이런 청사진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LG전자도 오픈 플랫폼 전략 아래 주요 생활가전에 다양한 AI 플랫폼을 연동시키고 있다. LG 스마트가전과 연동되는 AI 플랫폼은 LG전자가 독자 개발한 ‘씽큐’ 외에 ‘구글 어시스턴트’, 아마존 ‘알렉사’, 네이버 ‘클로바’ 등으로 늘어났다. 삼성전자가 ‘패밀리 허브’ 냉장고를 위주로 IoT를 구현한다면 LG전자는 와이파이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등을 활용해 스마트폰을 IoT 허브로 삼는 게 특징이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카테고리와 플랫폼이 서로 다른 제품을 연결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이런저런 앱 설치 등 불편함을 줄이고 개인정보도 철저히 보호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