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법과 절차가 사라진 사법개혁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조사하는 대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활동한 지 한 달이 됐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과 동시에 블랙리스트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현안’으로 꼽으며 신속하게 재조사 결정을 내렸다. 블랙리스트 매듭을 풀지 못하면 뒤이어 이어질 사법개혁 역시 순탄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실제로 판사회의를 주축으로 한 위원회 구성부터 블랙리스트가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법원행정처 컴퓨터 하드디스크 확보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판사회의’라는 든든한 지원군과 ‘적폐청산’이라는 시대적 이슈가 맞물리면서 모든 행위에 정당성이 부여된 듯했다.

하지만 조사는 의혹 규명의 핵심인 사법행정 담당자의 컴퓨터 개봉을 앞두고 제동이 걸렸다. 당사자 동의 없이 하드디스크를 열려고 하자 법적 문제가 발목을 잡은 것이다. 조사 전부터 언론과 정치권은 물론 대법관 상당수로부터 꾸준히 제기됐던 논란이었지만 뚜껑을 열기 직전에야 심각성을 인식한 것이다. 뒤늦게 법적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법률 검토서를 김 대법원장이 보고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법적 논란에 대해 충분히 알았을 이들은 어쩌면 대통령 탄핵 이후 변화된 분위기가 논란을 덮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들이 법률과 절차를 생명처럼 여겨야 할 법관이라는 점이다. 법원이 개혁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위헌·위법이라는 말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사적 감정을 도려내고 법률에 따라 엄격하게 집행해야 하는 법원과는 참으로 모순되는 말이다. 법원 안팎에서는 과연 사법개혁이 원활하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도 커지고 있다.

거센 법적 논란으로 블랙리스트 재조사가 잠시 멈췄지만 이들에게는 여전히 법적 문제에 대한 심각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 추가조사위의 주축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은 연이어 온라인에 “해당 판사의 동의가 없어도 강제 개봉이 가능하다”는 글을 올리며 법적 논란을 외풍으로 치부하고 있다.

사법개혁과 적폐청산 등 현재 이뤄지는 일련의 개혁 과정은 모두 법률과 절차를 따르지 않아 생긴 문제다. 사법개혁을 이끌어가는 이들은 모두 누구보다 더 법률과 절차를 지켜야 할 법관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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