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가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성 분도 은혜의 뜰에서 열린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활짝 웃어보이고 있다. /사진제공=샘터
“저는 원래 허영심이 많고 남학생들한테 인기도 좋았기 때문에(웃음) 수녀복 단벌 신사로 이렇게 사는 건 상상도 못했죠. 공주 같은 예쁜 집, 예쁜 옷, 세속적인 아름다움만 상상했거든요. 그런데 50년을 보내고 보니 스스로 대견합니다. 전쟁을 겪은 세대로 모든 삶에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한 번밖에 없는 청춘을 인류 공동의 선(善)과 좋은 일을 위해 바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19일 서울 용산구 동자동 ‘성 분도 은혜의 뜰’에서 만난 이해인(72) 수녀의 목소리는 연신 유쾌했고 표정은 밝았다. 지난 1968년 5월 성베네딕도수녀원에 들어갔으니 내년이면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맹세하는 수도서원 50주년을 맞는 그가 이같이 소회를 밝혔다. 6년 만에 신작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샘터 펴냄)’을 발간한 이해인 수녀는 “지난 50년을 돌아보면 행복하다”며 “시작할 때는 막연히 두렵고 끝까지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여기까지 왔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우리 수도원 공동체와 독자들, 그리고 나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의 첫머리에 “사랑으로 저를 키워주신 수도공동체와 언니 수녀님의 영전에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썼다. 가르멜수녀원의 ‘언니 수녀님’은 지난달 18일 타계한 이해인 수녀의 열세 살 위의 친언니를 가리킨다.
“내가 어릴 때 언니가 먼저 규칙이 엄격한 수녀원에 들어갔어요. 모태신앙이기는 했지만 언니를 통해 수녀원의 아름다운 생활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언니처럼 착하지도 않은 내가 여기서 끝까지 살 수 있을까 불안하긴 했어요. 그런데 50년을 이렇게 지내고 보니 스스로 대견하고 물빛 평화, 담백한 평화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먼저 간 언니 몫까지 착한 수도자로 마무리하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해인 수녀가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성 분도 은혜의 뜰에서 열린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제공=샘터
2008년 대장암 판정을 받은 후 ‘명랑투병’을 선언한 그를 둘러싸고 지난해에는 ‘죽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자신을 가난한 사람과 똑같이 대우해달라고 한 ‘마더 테레사’를 흉내 내보려고 성모병원이 아니라 부산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해 6인실을 썼어요. 내가 부스럭대고 시끄럽다고 옆에서 ‘아줌마, 가만 좀 있어요’ 하는 구박도 받고 굴욕도 당해봤고요(웃음).”본명인 이명숙으로 입원했던 그가 퇴원하던 날에야 비로소 이해인 수녀라는 게 알려졌다. 수원의 한 성당에서 강연할 때는 “수녀님, 안 돌아가셨어. 우리 성당에서 강연하고 있거든”이라는 통화를 엿들은 적도 있다. “사람들의 기도를 많이 받은 건 좋았다”며 농담을 건넨 그는 “(투병하는 동안) 언어가 주는 영향력을 강하게 느꼈고 나도 사람들에게 아플 때 용기를 주는 말을 많이 해야겠구나 생각했기에 약 먹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노년의 외로움을 겪는 분들을 위한 기도 같은 글을 이 책에 담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수녀인 동시에 시집과 산문집으로 대중적 사랑을 받았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 노트 겸 일기처럼 적은 글이 160권에 이른다. 대표작 ‘민들레의 영토’가 지난해 출간 40주년을 맞았고 앞으로는 “예쁜 그림동화를 써내고 싶은 갈망”이 있다고 했다.
성탄을 앞두고 그는 원로 종교인으로서 시대를 향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무슨 일이 터졌을 때 내 잘못을 보기보다는 항상 탓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게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나 자신도 전쟁을 겪은 바 있고 북한과의 관계를 보면 딱하고 김정은이 밉고 성토하게 되지만 어느 날 생각해보니 내가 진짜 저 사람을 위해 기도했나 반성하게 되더군요. 또 요즘 사람들이 너무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주변에 큰일이 터질 때 모른 척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이해인 수녀가 19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성 분도 은혜의 뜰에서 열린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제공=샘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