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 작가
얼마 전 산길을 거닐다가 껍질이 벗겨져 속살이 드러난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껍질 사이로 드러난 나무의 속살, 그 속의 꾸밈없는 무늬가 더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껍질이 벗겨진 나무에서는 달콤한 수액의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나무는 다쳤을 때조차도 품위를 잃지 않은 채 꼿꼿하고 향기롭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나무에 대한 책을 읽기 전에는. 우연히 페터 볼레벤의 ‘나무수업’을 읽다가, 나무가 흘린 수액은 바로 ‘나무의 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딱따구리는 나무의 수액을 노리고 신나게 나무를 쪼아대고, 나무는 자신의 체액을 딱따구리에게 내어주며 마치 인간이 피를 철철 흘리듯 커다란 손실을 입는단다. 그제야 ‘딱따구리가 쪼아댄 나무의 생살은 얼마나 아플까, 벌레가 할퀴고 간 나무의 피부는 얼마나 깊은 상처를 입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못한 내 무심함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나무를 향기를 발산하는 사물로, 지극히 효용론적 관점에서 이해했던 것이다. 식물들 또한 결코 소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식물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 무려 3천년 가까이 생존한 자이언트 세콰이어는 수십 차례 산불을 겪으며 오히려 더욱 강해졌다. 나무는 오랫동안 산불과 비바람을 견디며 무려 1미터에 달하는 수피 속에 물을 보관하여 일주일 넘게 계속되는 불길도 견딘다. 이 나무의 솔방울은 200℃ 이상의 고온에서 씨앗을 내놓는데, 주변 나무들이 불에 타 죽어가는 동안에도 이 나무는 기필코 새싹을 틔워 위기를 극복해낸다. 유영만의 ‘나무는 나무라지 않는다’에서 읽은 나무들의 비밀스런 사랑 이야기다. 나무들은 온몸의 열정을 다 바쳐, 인간을 뛰어넘는 적극성으로 사랑의 씨앗을 퍼뜨려 왔던 것이다.
어쩌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이야기에서 느낀 감동 또한 철저히 인간중심적인 차원이 아니었을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주고, 집을 짓는다며 나무를 베어가고, 마지막 남은 그루터기마저 벤치로 쓰이는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는 아낌없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빼앗기기만 한 것은 아닌지. 우리는 ‘보이지 않는 언어들’에 귀 기울여야 한다. 드러난 표현뿐 아니라 말로서 미처 전달되지 않는 것들, 침묵이나 여백 속에 존재하는 망설임들, 언어로서 차마 표현되지 못하는 타인의 슬픔까지도 보듬어 안는 마음 챙김이 필요하다. 상대의 안타까운 눈빛에서, 망설임의 몸짓에서, 발화되지 못한 언어의 흔적을 발견하는 몸부림이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끝내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희망이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언어도 신호도 없이 오직 마음속으로만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나는 참을 수 없이 아프다’고 절규하는 존재들의 슬픔에 귀 기울이는 연말이 되었으면. 이 추운 겨울, 우리보다 더 춥고 더 외로운 존재들이 소리도 없이, 언어도 없이 외치는 마음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의 귀가 살아나는 겨울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