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 기부 한파

“딸랑~딸랑~.” 숨 가쁘게 달려온 한 해를 마무리하는 세밑,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구세군의 따뜻한 종소리다. 소액으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데 자선냄비 만한 게 없지만 수백·수천 만원의 거액을 담는 얼굴 없는 기부천사도 곧잘 등장하기도 한다. 세밑을 상징하는 빨간색 구세군 자선냄비가 우리나라에 걸린 지 올해로 벌써 90년째다. 1928년 서울 종로와 서대문 등에 가마솥을 매단 형태로 냄비가 걸렸다. 자선냄비의 원조국은 미국이다. 1891년 1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해역에 선박이 좌초되면서 발생한 난민과 도시 빈민에게 나눌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쇠 솥을 내걸고 모금에 나섰다고 한다. “솥을 끓게 합시다”는 기부 호소는 전 세계로 확산해 오늘에 이르렀다.


구세군 냄비에 짝퉁 주의보가 내려졌다고 한다. 이달 초 대구 지역에서 짝퉁 냄비가 나타나더니 요즘은 하루에 한 개꼴로 전국에서 짝퉁 제보가 들어온다고 한다. 애를 태우던 교회 측은 급기야 ‘유사품’에 주의해달라는 당부까지 했다. 온라인상에는 진짜와 가짜 냄비의 구별법이 올라와 있다. 한 네티즌이 찍은 짝퉁 사진은 빨간색 냄비에다 빨간색 외투까지 걸쳐 무심코 보면 진위 구분이 되지 않는다. 진짜 구세군 냄비는 윗면보다 바닥이 조금 넓고 옆에는 위로 뻗은 손잡이가 달려 있다. 냄비뚜껑과 옆 면에는 ‘구세군 자선냄비 본부’ 검인과 일련번호가 찍힌 확인증도 부착돼 있다. 짝퉁이더라도 자선용도로 모금액을 사용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기부를 빙자한 갈취가 아닐까 걱정스럽다.

짝퉁이 판치는 세태 탓일까.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실시하는 사랑의 온도 탑이 예년보다 훨씬 낮다고 한다. 지난달 20일부터 시작한 모금 온도계의 눈금은 41도를 가리키고 있다. 내년 1월 31일까지 가동할 온도계는 목표액(3,994억원)의 1%를 채울 때마다 1도씩 올라간다. 통상 크리스마스 즈음 50도를 훨씬 넘는 과거에 비한다면 기부 한파가 아닐 수 없다. 희소병 딸을 위한 기부금을 가로챈 이영학 사건과 지난해부터 이어져 온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등이 기부문화에 찬물을 끼얹은 것으로 보인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나눔이 식어가는 것은 아닌지 다시 생각하게 하는 세밑이다. /권구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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