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커피믹스의 추락



문화비평가 겸 ‘발칙한 한국인’의 저자인 스콧 버거슨은 자칭 꽤 까다로운 커피 애호가다. 그에게 인스턴트 커피란 ‘사전에 들어 있지 않은’ 용서 못할 존재였다. 하지만 한국의 한 지하철 커피자판기에서 밀크커피를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섬세하기도 하고 초콜릿 향기가 느껴지기’도 했던 커피믹스의 향긋함은 그를 만원 지하철도 견디는 ‘육백만불의 사나이’로 둔갑시켰다. 그날 이후 그가 한국식 인스턴트 커피의 열렬한 ‘코노세르(connoisseur·애음가)’로 변신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식 커피의 대명사인 ‘커피믹스’가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1976년. 한 식품회사에서 다방에나 가야 마실 수 있었던 커피를 등산이나 여행할 때도 즐길 수 있게 하자는 의도에서 만들었다.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다방 ‘보통 커피’와 비슷한 맛을 내기 위해 커피와 프림·설탕의 배합비율도 1대3대2로 맞췄다. 가격은 다방의 3분의1 수준인 봉지당 45원. 여기에 1978년 커피자판기가 등장하고 1987년에는 설탕량을 조절하는 스틱형까지 나오면서 국민 기호품으로 자리 잡았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당시 13일 만에 구조된 18세 소녀가 가장 먼저 찾은 것도 커피믹스 맛의 캔커피였다.

커피믹스의 등장이 모두에게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여성 직장인에게는 달갑지 않은 변화였다. 커피믹스가 비서실의 필수품목이 되면서 “커피를 가져오라”는 심부름에 시달린 탓이다. 커피자판기 등장 이후 직접 타는 고생은 다소 덜었지만 커피 나르는 일은 양성평등 분위기가 무르익기 전까지 계속됐다. 다방도 매출이 급감하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한때 외국인 노동자들의 귀국선물 1호였던 커피믹스가 최근 고전을 면치 못하는 모양이다. 한 대형마트가 매출액을 분석한 결과 커피믹스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3위였지만 올해는 10위로 뚝 떨어졌다. 원두커피를 찾는 소비자가 많아지고 라테·모카·카푸치노 등 다양한 제품이 쏟아지면서 선택폭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취향과 세대가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커피믹스의 쇠락으로 세상살이의 ‘달달함’이 사라지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송영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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