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는 자연 친화적 삶을 지향하는 트렌드가 좀 더 과격하게 등장했던 모양이다. 구석기인처럼 고기와 채소를 먹고, 곡물과 유제품, 가공식품은 식탁에 올리지도 말자는 ‘구석기 다이어트’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러닝머신을 달리거나 반복적인 근육운동을 하는 대신 수렵채집인들의 비정기적, 비반복적 행동을 모델로 한 운동을 선호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심지어는 구석기인들이 성적으로 문란했고 출산 후에는 늘 아이를 엄마 품에 두고 잠들었다는 식의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믿고, 이를 따르는 것이 인간에게 더 적합하다는 식의 주장이 판을 쳤다.
이미 인간의 진화가 마침표를 찍었다는 환상 못지않게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오류는 진화가 수십만년 이상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이뤄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빠른 진화의 흔적은 우리 주변에도 많다. 날개 소리로 구애를 하던 일부 귀뚜라미 수컷은 파리 유충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날개 변이를 감수했고 소리를 내지 못하게 됐다. 이런 형질은 귀뚜라미 기준으로 20세대가 지나기 전인 불과 5년만에 귀뚜라미 집단 내에 퍼졌다. 불과 400~500년만에 인간이 말을 하지 못하게 진화하는 것과 비슷하다.
인간에게 나타난 빠른 진화의 단적인 예는 젖당을 소화하는 능력이다. 연구에 따르면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한 북유럽, 아프리카와 중동 일부에 사는, 세계 인구의 약 35%가 젖당을 분해할 수 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사는 지역이 한정돼 있다는 점이다. 초기 인류는 젖당 분해효소를 갖지 못했지만 약 2200~2만년 전 유목민, 고지대 거주민을 중심으로 소를 가축화하고 우유를 소비하기 시작하면서 활성형 젖당 분해효소를 가진 형질이 유전될 수 있었다.
좀 더 보편적인 진화의 증거는 인간 남성의 음경 뼈를 만드는 유전자가 사라진 것이다. 침팬지를 포함한 대부분의 포유동물은 음경 뼈가 딱딱해져 암컷의 생식 기관에 있는 다른 수컷의 정액을 파내버릴 수 있지만 정자 경쟁의 빈도가 줄어든 인간은 음경이 상대적으로 부드러워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 없이 진화하지만 진화의 결과가 늘 완벽한 것은 아니다. ‘진화=진보’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저자는 진화가 갈등구도 속에서 끊임 없이 타협한 결과물이며 따라서 우리의 적응력은 고장난 지퍼와 같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가령 딸국질, 탈장, 치질 등 물고기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해부학적 기예들은 특정환경에서 시작된 적응형질이지만 다른 환경에서는 우리에게 폐를 끼치는 대표적인 형질들이다. 성장기에는 생존이 이로웠던 유전자가 시간이 흐르며 질병을 유발하거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다. 긴 수명을 살기 위해 인간은 출산 후 부모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오랜 영아기를 거치도록 진화했지만 오래 산 탓에 암이나 노화 관련 질병을 겪는다. 이는 우리의 적응도가 ‘잘 사는 것’ 대신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형질, 후대에 더 잘 전달될 수 있는 유전자만 ‘살아남는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인류 집단이 커지면서 새로운 유전자 변이체의 숫자는 늘어나고 진화는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저자는 그저 우리의 몸은 끊임 없이 “땜질식 처방에 급급한 진화의 본성”을 따르고 있으며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 그에 따른 결과가 파생한다. 그러나 선택은 이루어져야 한다. 한 가지 또는 다른 환경에 통째로 적응한 유전자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이 구석기이건 중세건 산업사회건 마찬가지다. 그저 환경에 반응하는 유전자를 가질 뿐이다.” 1만8,000원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