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사설] 멀리 내다보고 발을 내딛자

문명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환경 아닌 도전에 대한 응전
G2충돌·통상전쟁 속 활로 찾으려면
적폐청산의 좁은 울타리 벗어나
넓은 안목으로 미래 준비해 나가야

#1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 6월. 서애 류성룡은 조선에 온 일본 사신의 태도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이전과는 달리 일본 사신의 행태가 거만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가지고 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한도 고압적인 내용 일변도였다. 이를 보면서 류성룡은 일본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이후 류성룡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589년 기축옥사가 발생하면서 동인과 서인 간 갈등의 골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그 여파로 동인과 서인은 상대방 말을 아예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급기야 1591년 3월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들 간에 일본의 침략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는 바람에 전쟁 대비는 끝내 하지 못했다. 1592년부터 7년 동안 우리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임진왜란은 이런 자중지란과 무방비 속에서 일어났다.

#2 마거릿 대처가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에 당선된 1979년 영국 경제는 노조 파업과 기업 파산, 높은 실업률로 엉망진창이었다. 대처는 이 같은 ‘영국병’을 치유하기 위해 국가 개조 수준의 혁신을 시도했다. 대처는 무려 363일간의 싸움 끝에 탄광노조를 굴복시켰고 집권 12년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노동관계법을 개정해 원칙을 바로 세웠다. 또 국유기업을 민영화하고 빅뱅이라 불리는 금융개혁을 단행했다. 대처 자신도 대중정치인이었지만 인기보다는 ‘영국의 재건’이라는 목표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과감한 구조조정이 성과를 내면서 영국 경제는 1990년대 중반부터 눈에 띄게 좋아졌고 1999년에는 프랑스를 제치고 세계 네 번째 경제대국이 됐다. 이를 통해 대처는 국민들에게 ‘대영제국의 영광 재연’이라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2018년 우리는 어느 길을 갈 것인가. 국운융성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내부 분열로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할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대응에 달려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환경은 녹록지 않다. 국제적으로 보면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주요2개국(G2)의 반열에 오른 중국은 전례 없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배치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가 국제문제로 비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런 틈바구니 속에서 안보의 활로를 찾아야 하는 절박한 처지다. 여기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보호주의 파도가 거세게 밀려오고 있다. 악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우리를 덮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위기들은 온 국민이 똘똘 뭉쳐도 헤쳐나가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지난 7개월 동안 문재인 정부는 적폐청산이라는 좁은 프레임에 갇혀 국가 미래 설계라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적폐청산을 첫 번째 국정과제로 제시한 후 부처마다 태스크포스(TF)나 개혁위원회를 만들어 이전 정권의 잘못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7개월 넘게 적폐청산이 이어지면서 검찰조차 피로감을 호소하고 있지만 문 대통령은 요지부동이다. 문 대통령은 “촛불민심을 받들어 나라를 나라답게 하는 일은 1~2년 안에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해 새해에도 적폐청산 작업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물론 지나간 일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하고 때로는 단죄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난 일에 대한 반성은 미래 대비와 연결돼야 의미를 갖는다.

촛불민심이 진정 바라는 것은 특권과 반칙 없는 공정사회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인적청산이 아니라 법적·제도적 틀을 개혁하는 일이다. 전직 대통령의 종말이 모두 불행해지고 5년마다 전 정권에 대한 청산이 이뤄지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5년 단임 대통령제의 폐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견제와 균형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꿔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정당이 정파의 이익을 떠나 오로지 국가의 앞날을 내다보고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신성장동력 확보다. 조선과 철강 등 기존 주력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열지 못하면 우리는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세계는 4차 산업혁명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드론과 인공지능(AI), 자율주행차 등의 개발에 사활을 걸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온갖 규제의 덫에 갇혀 신산업의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있다. 규제프리존법과 서비스발전법 등 신산업을 지원할 법안은 국회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교육·노동 시스템도 유연성과 융합이 생명인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맞지 않는 낡은 틀을 갖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외국 기업과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나라가 4차 산업혁명의 호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시대 변화에 맞춰 하루빨리 제도적 틀을 만들어줘야 한다.

또 하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본과 노동의 조화다. 지금까지 보수 정부는 자본 쪽에, 진보 정부는 노동 쪽에 주안점을 두면서 이 둘을 연결하는 데 소홀했다. 이 때문에 정부·기업·가계 등 경제주체 간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매년 엄청난 예산을 쏟아붓는데도 정책이 헛바퀴만 도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현 정부도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명분 아래 분배와 노동을 중시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두 날개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멀리 날 수 없다. 노동개혁과 기업 활력 제고에도 나서야 하는 이유다.

아널드 토인비는 ‘역사의 연구’에서 한 문명의 흥망성쇠는 자연적 조건이나 외적의 침입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 구성원들이 도전에 얼마나 잘 응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설파했다. 비록 외부적인 환경이 우호적이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역경도 얼마든지 순경(順境)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골든타임은 그리 많지 않다. 모처럼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됐을 때 권력구조 개편을 해야 하고 국가 신성장동력 준비도 해나가야 한다. G2의 틈바구니에서 안보의 활로를 찾는 작업도 해야 한다. 이러한 때에 과거 청산에만 매달려 있으면 미래 대비는 할 수가 없다. 무술년 새해가 밝았다. 정부는 이제부터라도 긴 호흡과 넓은 안목을 가지고 먼 미래를 내다보고 국가를 운영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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