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사진) 국회의장은 2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신년 인터뷰에서 “낮은 자세로 국민들을 섬기고 소통하며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점은 높게 평가한다”면서도 “하지만 정부가 야당과의 협치에 실패할 경우 국정운영의 발목이 잡혀 아무리 좋은 정책도 실천에 옮길 수 없다”며 집권 2년 차를 맞은 문재인 정부를 향한 애정 어린 고언을 쏟아냈다.
정 의장은 문 대통령이 야당과의 협치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협치에 대한 선의보다는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를 위해서는 야당과의 협치를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설득하는 작업을 이어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과거에는 정부·여당이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통해 ‘여소야대’의 구도를 ‘여대야소’로 바꿨겠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국민들은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라고 하면서도 인위적 정계개편은 절대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죠. 결국 여소야대의 정국 속에서 정부·여당이 추진하는 정책들을 야당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협치의 선의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 성과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정 의장은 집권 2년 차에 접어드는 문재인 정부가 경계해야 할 점으로 지나친 공약 강박증을 꼽았다. 임기 내에 모든 공약을 완수하려는 것은 자칫 과욕이 돼 문재인 정부에도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새해 들어 완급 조절이 필요한 공약으로 ‘최저임금 인상’과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를 제시했다. 물론 두 가지 공약 모두 정 의장이 전적으로 지지하는 정책이다. 하지만 공약 이행을 추진하기에 앞서 현장 상황을 살펴보고 당장 정책을 시행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 등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 의장은 “최저임금 인상에 찬성하는 입장이지만 노동계와 경영계가 처한 전후좌우 상황을 따져보면서 정책 집행에 나설 필요가 있다”면서 “당장 올해부터 최저임금 인상으로 영세 자영업자나 중소기업들이 아우성을 치면서 정작 수혜 대상이 돼야 할 노동자들까지 불행해질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자칫 제대로 된 검증 없이 정책을 추진할 경우 정책의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정 의장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최저임금 산입범위 조정에 대해서도 “최저임금 인상안을 논의할 때부터 함께 다뤄졌어야 할 문제”라며 “최저임금 인상 시행으로 기업들의 경영난이 가중될 것으로 우려되니 지금에서야 기준을 다시 설정하겠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서울경제신문 독자들에게 보낸 새해 인사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 역시 정책 시행에 앞서 좀 더 세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정 의장은 강조한다. 그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따른 부작용을 사전에 파악해 그에 맞는 조치를 동시에 펼치지 않으면 기업 입장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며 “이는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간의 ‘노(勞)-노(勞) 갈등’을 유발하면서 결국 불필요한 갈등에 따른 사회적 비용 지출로 이어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 제로의 1호 모델로 추진해온 인천공항공사가 대표적이다. 정 의장은 이러한 미숙함을 문재인 정부가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정 의장은 국민들이 새해 최우선 국정과제로 요구하고 있는 경제 활성화를 뒷받침하기 위한 관련 법안 처리에도 정부와 국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특히 수년간 국회에서 계류 중인 ‘규제프리존특별법’과 ‘서비스산업발전법’ 등 경제 활성화 법안에 대한 정부·여당의 전향적인 자세 변화도 촉구했다. 이들 법안은 19대 국회 당시 여당이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이 기업 경영활동을 촉진한다는 목표 아래 발의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로 아직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여야 정치권이 지난 19대 국회 때의 기준과 사고에만 머물러서는 대한민국이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도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과 새 시대를 준비하는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국민의 생명·안전과 직결되는 분야를 제외하고는 화끈하게 규제를 개선해 기업들의 경영활동을 지원해야 합니다.”
정 의장은 “국가 경제가 살아야 기업도 있고 노동자도 존재할 수 있는 법”이라며 “경제 활성화 없이는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 길을 외면한 채 서로 편 가르기를 하면서 내 몫만 챙기다 보면 결국 다 같이 망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경영계뿐 아니라 노동계도 대화의 테이블로 나와 함께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올해 20대 국회의 최대 화두인 개헌으로 주제를 옮기자 정 의장은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안타까운 심정을 나타냈다. 올해 6·13지방선거에서의 개헌 국민투표를 목표로 국회 차원의 개헌특위가 마련된 지 1년이 넘었지만 여야의 정쟁 속에 아직 이렇다 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사실상 연내 개헌은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개헌 역사를 되돌아보면 주로 집권세력들이 권력 연장 등 자신의 필요에 의해 헌법 개정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대선 당시 여야 모든 후보들이 지방선거·개헌 동시 투표를 국민들에게 약속했습니다. 그야말로 국민과 국회, 정부가 함께 개헌을 이뤄낼 수 있는 최적의 기회입니다. 그런데도 선거가 끝났다고 해서 개헌을 다시 미루자는 것은 국민들에게 염치없는 짓입니다.”
정 의장은 국회 차원의 개헌안이 끝내 마련되지 못할 경우 문 대통령에게 개헌안 발의를 요청할 수 있다는 뜻도 밝혔다. 그는 “지금까지 축적된 개헌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일각에서 ‘데드라인’으로 삼고 있는 2월을 넘어 3월까지만 개헌안을 도출해도 지방선거 때 개헌투표가 가능하다”며 “결국 여야 정치권의 결단만 남아 있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정 의장은 “당연히 입법부인 국회가 개헌안을 마련하는 게 맞지만 여야 합의 실패로 개헌안을 내놓지 못한다면 국회에서 논의된 내용을 토대로 문 대통령에게 개헌안 발의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며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대한민국의 새로운 먹거리 발굴 등 민생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데 언제까지 정부와 정치권이 개헌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강조했다.
/정리=김현상·하정연기자 kim0123@sedaily.com 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