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상 ‘설송도’ 종이에 그린 수묵화, 117.3x52.6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훤칠하게 뻗은 낙락장송이 눈앞을 턱 막고 섰다. 그 소나무 참으로 반듯하구나. 곧기가 전봇대 같은 것이 기개가 치솟아 화폭을 뚫었다. 나무 윗부분이 화면 너머로 툭 잘렸으니 그 높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호락호락하지 않겠다는 심산인가. 나무 위로 소복소복 눈이 내렸건만 추운 기색은커녕 늠름하기만 하다. 옅고 맑은 먹으로 그린 데다 눈 내린 설경이지만, 독야청청 푸르른 잎은 망설임이 없다. 실제 푸른 색은 조금도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 매서운 바람이 나무의 푸른 서슬을 더 돋군다. 사찰 입구를 지키는 일주문 기둥처럼 나무줄기는 듬직하고 곧으나 굽고 성긴 그 가지는 굵은 뼈마디처럼 울룩불룩하다. 그린 이의 곧은 심성과 삼엄한 골기(骨氣)를 보여주는 나무다. 쉽사리 남 칭찬을 하지 않았던 추사 김정희마저 문기(文氣) 충만한 문인화가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운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의 ‘설송도’다.
이인상 ‘송하관폭도’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자극적인 볼거리도 숨은 꼼수도 없는 그림이다. 여명도 석양도 아닌 때 모를 시간에, 햇빛과 달빛 중간쯤이려나 주변은 어슴푸레하다. 살짝 일어난 바람이 내려앉았던 눈발을 안개처럼 흩어놓아 주변을 자욱하게 덮었다. 그럼에도 두 그루 소나무는 독야청청 산을 지킨다. 어쩌면 이것은 남에게 보여주려 그린 그림이 아니라 혼자 보며 스스로를 가다듬기 위해 그린 것 아니었을까. 이 설송도를 꺼내볼 때 화가는 거문고를 뜯으며 적막을 갈랐을지 모를 일이다. 듣는 이 없어도 홀로 연주하는 음악처럼 보는 이 없어도 자기 수양을 위해 그린 그림은, 거울처럼 작가를 곧추세웠다. 그렇게 떡하니 버틴 대찬 소나무의 기세 뒤로 노송은 허리가 휘듯 드러누웠다. 긴 세월 모진 풍상 겪으면서도 버티고 또 견뎠다. 곧은 나무와 누운 나무가 거의 십(十)자 구도를 이룬다. 기묘하다. 결코 부러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은 휜 나무의 등걸 위로도 눈이 쌓였다. 비애감을 느끼게 하는 굽은 줄기지만 가지 끝 이파리만은 총총하니 장엄함마저 느껴진다.
보물 제 1679호 ‘원령필’. 이인상이 전서와 예서를 적은 총 3권짜리 서첩이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작품이 곧 인품이라 했다. 이인상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 절로 이 기묘한 그림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의정까지 지낸 그의 고조부 이경여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는 왕을 호위했고 무력으로 세워진 청(淸)을 배척하고 명(明)을 받들어 ‘천하의 큰 의리’를 강조한 인물이다. 이후 줄줄이 3대에 걸쳐 정승을 배출하며 조선 4대 명문가로 꼽힌 집안에서 이인상은 태어났다. 그러나 증조부가 서자였다. 출세의 한계가 있는데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여의어 가난하게 살았다. 그럼에도 학문에 한치의 소홀함도 없었고 명문가 후손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다. 그 성실함과 우수함, 굽힐 줄 모르는 지조가 사대부들의 존경을 샀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이인상의 전세살이가 안타까웠던 친구 몇이 서울 남산 기슭에 집을 마련해줬다. 그는 대문 위 편액에 ‘능호(凌壺)’라 적었고 ‘능호관’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비록 서출이지만 노론의 골수였던 가문의 영향은 그의 뼛속 깊이 자리 잡았다. 이인상의 ‘설송’이 보여주는 꼿꼿한 소나무는 그의 사상에서 움텄다. 그는 명나라에 대한 존중으로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존명배청(尊明排淸)’을 평생 고집했다. 병자호란의 치욕은 잠시 접고 청과 교류해야 한다는 현실주의적 태도가 당대 조선 지식인들에게 급속도로 퍼져가던 때였다. 이인상은 점차 설 자리가 좁아졌고 외로웠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인상의 문학 세계를 집약해 보여주는 글 모음집 ‘능호집’(박희병 번역, 돌베개 펴냄)에서도 시대 변화에 부합하지 못할 정도로, 그리하여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시대착오)으로 보일 만큼 타협할 줄 몰랐던 그의 지조와 신념이 드러난다.
일명 ‘검선도’라 불리는 이인상의 ‘송하인물도’는 소나무 아래 앉은 신선을 그리고 있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문인화가에게 그림이란 부단히 갈고닦은 글씨의 필력과 학문적 성취에 기반한 높은 정신성의 산물이었다. 글이 곧 그림이요, 그림이 곧 글이고 정신이니 이인상은 글씨 중에서도 전서와 예서에 특히 뛰어났고 전각도 탁월했다. 이 같은 이인상을 두고 김정희는 “200년 이래로 따를 자가 없는 고결함이 있다”고 칭송했다. 추사는 청의 고증학과 금석학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기에 능호관과 지향하는 바가 달랐지만 그 실력만은 높이 평가한 것이다. 김정희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인상의 예서법과 화법(畵法)에는 문자의 기운이 있으니 살펴보라”고 일렀을 정도다.
27세에 진사시 급제한 이인상은 오늘날 경남 함양 부근의 사근역(驛)을 관리하는 ‘찰방’으로 부임했다. 관직에 오르자 그간 즐겨 그렸던 그림을 모조리 꺼내 불사른 일화가 전한다. 일에 방해될 것을 지레 염려한 탓이다. 대문을 마주하고 사는 지인과도 “날이 어두우면 서로 왕래하지 말고 야간 통금을 지키자”고 약속할 정도로 엄격했다. 답답하리 만치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보수적인 사람이었으나 이인상은 두루 칭송받은 지조있는 보수요, 그와 반대 입장에 선 이들까지 존경하는 보수였다.
사람을 알고 그림을 다시 보자. ‘설송도’의 두 나무는 이인상 자신이다. 올곧은 성품은 대쪽보다 더 꼿꼿한 소나무요, 신분의 제약이나 이념적 핍박에도 부러지지 않고 견딘 허리 휜 노송이기도 했다. 그는 담박함이 특색인 그림을 그리기 전, 쌀가루를 탄 물에 종이를 적셔 다듬이질해 종이 빛을 맑고 깨끗하게 했다고 한다. 그 효과인지 그저 하얗지만은 않은 눈색(雪色)이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 담담함 속에 완고함이 혼재하고 옅은 분위기 속에 서릿발 같은 기운이 느껴지니 추사의 ‘세한도’를 보는 듯하다. 잎사귀는 까칠까칠하고 뿌리가 박힌 바위는 깨진 얼음처럼 예리하다. 흙 한 줌 없이 척박한 바위 무더기라 그 속에서 자라난 소나무가 더 장하게 여겨진다.
‘설송도’ 못지않게 기이한 이인상의 그림으로 ‘송하관폭도’를 꼽겠다. 바위와 폭포를 배경으로 오랜 세월을 지켜온 낙락장송이 눕듯이 기울어 폭포를 내려다본다. 휘어진 등걸은 늙은 용의 등껍질 같고 가지는 이리저리 굽었어도 솔잎만은 선명한 푸른빛이다. 이인상은 잎줄기의 유려함이 제맛인 묵란을 꼿꼿한 수직으로 세워 그리는가 하면 겨울까지 버티다 야위고 병든 ‘병국도(病菊圖)’를 그리기도 했다. 하나같이 독특한 이들 그림은 모두 작가 자신을 빗대 보여준다. 풍경화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구룡연’이 인상적이다. 금강산 절경 앞에서 흥분했던 겸재 정선과는 사뭇 다르며, 압도적인 공간감을 그려낸 김홍도와도 멀다. 싱거울 정도로, 그저 초연할 뿐이다. 그림 아래에는 “1737년에 금강산을 여행한 후 15년이 지나 그 감회를 회상하며 그렸다”고 적혔다. 산행 당시 이인상은 고독과 비애감을 많이 느꼈다고 하는데 그 심상이 각진 바위를 간략한 선으로만 처리한 그림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유명한 글을 모아 이인상이 예서와 전서로 쓴 3권짜리 글씨책 ‘원령첩’은 보물 제1679호로 지정돼 있다.
우리 문화재를 대중 눈높이에 맞춰 소개한 것으로 유명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도 이인상의 생애를 주제로 일찍이 석사논문을 썼을 만큼 안목있는 이들은 능호관을 특별하게 귀히 여긴다. 유 전 청장은 저서 ‘화인열전’ 등에서 ‘종강모루(鐘岡茅樓)’를 소개했다. 벼슬을 떠나 은거하기로 결심한 이인상이 45세이던 1745년 자신이 현감을 지낸 음죽현에서 조금 떨어진 설성에 지은 작은 정자다. 능호관은 그곳에 자신의 좌우명을 새겼다.
“…꾸밈이 실질보다 우세하지 않고 행실은 명예를 쫓지 않는다. 말은 속되지 않고 읽는 것은 다만 경서뿐이다. 담담하게 벗을 받아들이고 옛것을 본받는 것을 법으로 삼는다. 궁핍해도 천명을 어기지 않으리니 꿈에도 또다시 맑을지어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