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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막판 다급하게 법정으로 뛰어든 수사관이 검사에게 USB를 전달한다. 이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검사는 단호한 말과 함께 USB를 증거로 제출한다. 검사의 손에 들린 USB에 법정의 모든 시선이 쏠리고 USB는 즉각 증거로 채택된다. 잠시 후 그 속에 담긴 영상을 본 사람들은 깊은 탄식을 뱉어낸다. 곧바로 법정 안에 있던 진범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진범은 울분에 찬 목소리로 검사를 비난하며 끌려나간다. 영화 내내 검찰에 불리하게 흘러갔던 재판은 막판 USB에 담긴 동영상 하나로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최근 개봉했던 영화 ‘침묵’ 등 법정 영화나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치열한 법정 공방을 한순간에 정리하는 이 같은 장면은 실제 법정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법정에서는 아무리 결정적인 증거자료라 해도 먼저 증거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행법은 증거재판주의를 형사증거법의 기본원칙으로 채택하고 있다. 형사소송법 제307조에 따르면 공소범죄사실 등 주요 사실은 증거능력이 있고 적법한 증거조사를 거친 증거에 의해 인정된다. 증거능력이 없는 증거는 사실 인정의 자료로 인정받지 못하고 공판에서 증거로 제출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증거능력에 대한 검증 없이 증거조사를 허용하면 선입견 등 법관의 심증 형성에 부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실제 법정에서는 유력한 증거라고 해도 먼저 재판부가 확인을 한 뒤 원고 측과 피고 측에 증거를 보여 준다. 이후 상대방 측은 증거 사본을 가지고 가 분석을 한 뒤 증거 의견을 다음 기일 전까지 제출하게 된다. 다음 공판이 열리는 날 재판부는 양측의 의견서를 검토한 뒤 증거 채택 결정을 하게 된다. 상대방 측이 그 자리에서 증거 채택에 동의하면 과정은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제출된 증거로 인해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된다면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 수도 있어 충분한 검토 시간을 갖는 게 통상적인 절차다.
/노현섭기자 hit812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