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들이 가상화폐 거래소에 400만여개의 가상계좌를 앞다퉈 발급해준 것으로 드러나면서 은행들이 지금의 가상화폐 투기판을 깔아준 것 아니냐는 책임론이 도마에 올랐다. 특히 전자상거래나 대금 수납에 주로 쓰이는 가상계좌를 거래소에 무분별하게 제공함으로써 수조원의 자금유입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애초에 이같이 자금 이동 경로가 파악되지 않는 가상계좌의 활용을 내버려둔 정부도 방조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18일 금융권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가상화폐 투기 붐으로 유입되는 사람들을 한국 거래소들이 받아내며 세계적인 규모로 클 수 있었던 것은 은행들의 가상계좌 공급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개개인마다 계좌번호를 부여해 입금을 실시간으로 받을 수 있는 이 시스템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거래소들이 몰려드는 고객과 자금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은행들로부터 가상계좌를 제공받지 못해 법인계좌로 수취하고 있는 중소형 거래소들은 입금 업무에 수 시간에서 수일씩 걸리면서 투자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 중소형 거래소의 한 관계자는 “법인계좌로 감당할 수 있는 고객 수는 많아야 10만명 수준”이라며 “빗썸이나 업비트가 백만명 이상의 고객의 거래를 중개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가상계좌 덕”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가상화폐 거래소에 가상계좌 공급을 처음 시작한 농협은행과 기업은행은 각각 200만계좌와 120만계좌를 공급하며 거래소 급성장에 일조했다.
애초에 가상계좌가 개개인의 금전 거래가 이뤄지는 가상화폐 거래소에 제공된 것 자체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가상계좌는 전자상거래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대금을 받거나 주기적으로 이용료를 수취하는 곳에 주로 쓰인다. 즉 고객에게 입금을 용이하도록 하는 것으로 안에 들어간 자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전혀 추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은행들이 이를 거래소에 무분별하게 공급한 것이다. 해외 가상화폐 거래소의 경우 카드결제로 입금을 받거나 연결된 은행의 홈페이지를 띄워 입금을 받아 자금 출처가 명확하다. 또한 카드결제 시 수수료를 2~3% 수취하기 때문에 개인이 많은 자금을 넣기에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가상계좌는 은행지점이 영업해 발급하기도 하지만 세틀뱅크와 같은 가상계좌 중개업체가 은행에 물량을 대거 떼온 후 필요한 업체에 공급하기도 한다. 가상계좌를 이용하는 업체가 어떤 곳인지도 모른 채 은행이 서비스를 제공할 수도 있는 ‘관리 사각지대’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가상계좌는 범죄에 쓰이는 등 오용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가상화폐 거래소를 가장해 가상계좌를 발급받은 후 300억원 규모의 자금을 입금받아 도박 사이트에 전달한 업체가 검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정부가 지금까지 이같이 허술한 가상계좌가 널리 쓰이도록 방치한 데 대한 지적도 나온다. 현재 정부의 주도로 가상화폐 거래소와 은행 간 구축하고 있는 실명확인 입출금계정 서비스를 일찍이 확산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또 은행도 이 같은 시스템 개발에 드는 비용을 부담하고 싶지 않아 손쉬운 가상계좌 발급을 남발해온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자금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가상계좌가 이렇게 남발되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며 “가상계좌라는 시스템 자체를 손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주원·조권형기자 joowonmai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