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동양학 교수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사람이 기본적으로 동물의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이성을 발휘해 동물과 다른 사람다움을 실현할 수 있다. 몸집·감각능력·신체구조의 측면에서 인간은 동물에 비해 객관적으로 뒤떨어진다. 하지만 이성을 발휘해 정의와 나눔의 도덕을 추구하고 인공지능과 가상현실의 과학기술을 실현할 수 있다. 후자가 바로 이성으로 일궈낼 수 있는 인간의 빛나는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접속해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면서 이성의 혜택을 나날이 확인하고 있다.인간에게는 동물성과 이성 이외에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이 있다. 바로 후천적 학습을 통해 획득하게 되는 제2의 천성, 즉 습관이다. 습관은 사람이 환경과 사회의 대응 관계에서 성공을 거둬 안정적인 방식으로 굳어진 측면을 가리킨다. 야구에서 투수는 투구하기 전에 늘 하던 동작을 되풀이하고, 노동에서 기술자는 이미 검증된 방식으로 작업을 되풀이하고, 정치인은 지지층의 결속을 위해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구태의 매뉴얼을 반복한다. 습관은 하나의 대응 방식으로 수립될 때 분명 유효성과 효과가 검증됐다. 그 덕분에 습관의 매뉴얼이 교과서로 쓰여서 사회 각 분야의 신입은 연수 과정에서 그것을 배우게 된다.
‘대학’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했던 상나라 탕(湯) 임금의 사례를 제시하며 사람이 관습에 안주하려는 타성을 넘어서 나날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영구 혁신과 평생 학습의 가치를 일깨우고 있다. 상나라 때 사람이 목욕을 하거나 세수를 할 수 있는 큰 그릇으로 반(盤)이 있었다. 오늘날 세숫대야나 욕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목욕은 몸의 묵은 때를 벗겨 내는 일로 시간이 꽤 걸린다. 탕은 몸의 때를 벗겨 내는 긴 시간을 그냥 흘러 보내지 않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반에다 글귀를 새겼다. “진실로 하루라도 새로워지려면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구일신·苟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又日新).”
탕은 세숫대야에 아홉 글자를 새겨 관성에 안주하려는 자신을 일깨우려고 했다. 이렇게 새로워지려는 의지는 목욕을 통해 그 의미가 크게 증폭됐다. 몸이 목욕해 깨끗해지고 마음도 관행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워지는 결의를 다지게 되는 말이다. ‘성경’에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포도주가 발효되는 과정을 견뎌내서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탕이 세숫대야에 새긴 글을 반명(盤銘)이라고 한다. 그 뒤로 사람이 생활하던 주위 장소나 주위에 있는 물건을 글귀를 새겨서 스스로 다짐을 하는 경우 좌우명(座右銘)이라고 불렀다. 흔히 시험 철이 되면 책상 앞에 시험 일자나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는 말도 일종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와 혁신이라고 하면 조직 개편과 구조 개선처럼 거창하며 외부에서 강요하는 운동성 정책을 떠올리기 쉽다. 그리해 사람들은 변화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기존의 관행에 묻어 안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려면 신진대사(新陳代謝)가 원활하게 일어나야 하듯이 자연과 사회의 환경을 맞이해 슬기롭게 대처하려면 달라짐을 피할 수만은 없다. 달라짐은 인간이 이성을 발휘해 새로운 습관을 창출하는 과정이다. ‘대학’은 ‘일신우일신’하던 탕 임금의 자세를 통해 삶의 크고 작은 다양한 분야에서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맞이하는 지혜를 제안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짧게는 한 해 길게는 평생 동안 자신을 이끌어가는 좌우명을 되새겨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