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약 산업은 규제 개혁으로 수혜를 가장 많이 본 분야로 꼽힌다. 한국보다 인구가 2.5배 많은 일본이 제약 산업에서 4배까지 격차를 벌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1990년대 중반 도입된 산업재생법을 바탕으로 산업생태계를 새로 조성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에는 1,500여개에 달하는 제약사가 난립했고 신약 개발이 아닌 제네릭(합성의약품 복제약) 출시에 사활을 걸었다. 경쟁사보다 점유율을 늘리려는 마케팅 경쟁은 불법 리베이트로 이어졌고 일본 제약 산업은 급격하게 경쟁력을 잃어갔다. 무리한 경쟁이 수익성 악화를 낳고 이것이 다시 연구개발(R&D) 투자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일본 정부는 불법 리베이트를 처벌하는 ‘극약 처방’ 대신 제약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생태계 조성’을 표방하며 산업재생법을 도입했다. 신약 개발에 나서거나 인수합병(M&A)을 단행한 제약사에 파격적인 세제 혜택과 연구개발비를 지원한 것이 대표적이다.
내수 시장을 둘러싼 출혈 경쟁에 나섰던 일본 제약사들은 신약 개발에 드는 천문학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M&A에 눈을 돌렸다. 곧이어 다케다·다이이찌산쿄·아스텔라스·교와하코기린·다나베미쓰비시 등의 대형 제약사가 탄생했고 자연스레 영세 제약사들이 퇴출돼 10여년 만에 일본 제약사는 300여개로 줄었다.
덩치를 키운 일본 제약사들은 글로벌 제약사를 상대로 M&A에 나섰다. 일본 최대 제약사로 꼽히는 다케다는 2005년 미국 바이오벤처 시릭스를 2억7,000만달러에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2008년 88억달러에 미국 바이오 기업 밀레니엄을 품에 안았다. 지난해 초에는 백혈병 치료제를 개발하는 미국 아리아드까지 52억달러에 인수해 글로벌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케다의 연매출은 지난 2015년 기준 161억달러로 글로벌 19위다. 다케다를 비롯해 매년 글로벌 50대 제약 기업에 이름을 올리는 일본 제약사도 열 곳에 달한다. 국내 최대 제약사인 유한양행의 매출이 1조5,000억원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 비춰보면 격차는 더욱 두드러진다.
신약 개발에 잇따라 성공하면서 일본 제약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도 급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매출액 기준 글로벌 의약품 상위 100개 중 11개가 일본 제약사의 제품이다. 80조원에 달하는 일본 제약 산업은 단일 국가로는 미국과 중국에 이은 글로벌 3위다. 공격적인 M&A로 신약 개발을 앞당기고 신약을 통해 확보한 자금을 다시 R&D에 투자하는 선순환구조가 일본 제약사의 글로벌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핵심이라는 얘기다.
아키라 가와하라 일본제약공업협회 글로벌담당 이사는 “한국 제약사들도 최근 들어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엇비슷한 제품을 갖고 가격 경쟁에 주력한다는 점에서 출혈 경쟁을 일삼았던 1990년대 일본 제약 시장과 흡사하다”며 “일본 제약 산업이 단기간에 글로벌 무대에서 통하는 역량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규제 일변도의 정책에서 벗어나 신약 개발을 위한 생태계 조성에 눈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도쿄=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