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계 트렌드가 다가온다

이 기사는 포춘코리아 2018년도 1월 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남성용 시계가 기계적으로 정교하게 디자인 되었다면, 여성용 시계는 다이아몬드와 귀금속 등으로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파텍 필립 Patek Philippe의 샌드린 스턴 Sandrine Stern과 새로운 취향의 여성 시계 수집가들이 그런 트렌드를 바꿔 놓고 있다.


스위스의 플랑레우아트 Plan-les-Ouates 본사에서 포즈를 취한 파텍 필립 시계 제작 부문 총괄책임자 샌드린 스턴.

매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시계 박람회 바젤월드 Baselworld에서 올해 특히 눈에 띈 제품 중 하나는 파텍 필립의 7130G였다. 파텍이 가장 최근 출시한 월드타임 레퍼런스 World Time Reference *역주: 홈 타임과 로컬 타임을 동시에 보여주는 파텍의 인기모델 로, 직경 36mm 화이트골드 케이스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시계 중앙에는 (동일한 곡선이 반복되며 교차하는) 길로쉐 guilloche 문양과 청록색 다이얼 Dial *역주: 시계의 문자판 이 자리잡고 있다. 바깥쪽 햇살무늬(sunburst)의 챕터 링 chapter ring *역주: 시계 문자반의 링 이 24개의 시간대를 보여주고, 베젤(시계 테두리)에는 62개의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혀있다. 사파이어 크리스털 케이스 뒷면을 통해선 금으로 된 초소형 로터(회전 날개)와 48시간 파워 리저브 power reserve(동력의 지속시간)를 자랑하는 시계 무브먼트 *역주: 시계가 작동하도록 하는 내부장치 를 볼 수 있다. 가격이 5만 1,000달러를 상회하는 7130G는 시계에 열광하는 남성 구매자들을 사로잡을 만큼 정교한 기계식 시계의 전형이다. 문제는 이 제품이 여성용 모델이라는 점이다.

한 때 이런 시계는 남성 고객의 전유물이었다. 시계 속 마이크로 기계공학의 정교함과 (적지 않은 금액의) 시계를 차는 데 따르는 사회적 지위가 이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이제 여성들도 보석으로 장식된 단순 배터리 구동형 시계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정교하고 복잡하게 움직이는 기계식 시계를 찾고 있다. 또한 이들은 남성 구매자들과 마찬가지로, 시계에 10만 달러 이상을 기꺼이 투자하고 있다.

여성 소비자들이 기계식 시계에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데에는 전반적인 사회적 변화가 투영되어 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정·재계 고위직 여성들이 늘고 있어 구매력이 커지고 있다. 텍사스에 본사를 둔 드 불 다이아몬드 앤드 주얼리 De Boulle Diamond & Jewelry의 CEO 드니 불 Denis Boulle은 “우리 여성 고객 중에는 파텍 시계 30개를 보유한 분도 한 사람 있다”고 말했다. 그는 “2년 전 필립 파텍이 휴스턴에 두 번째 매장을 열었는데, (그곳에서) 판매되는 제품 중 절반이 여성용”이라며 “이는 전례 없는 일로, 이 부문의 성장세를 잘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파텍필립의 시계 제작 부문 책임자 샌드린 스턴에 따르면, 여성들은 실용성과 스타일을 모두 갖춘 시계를 원한다. 샌드린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여성 고객들이 가장 큰 중점을 두는 부분은 디자인이다. 그 다음은 날짜 표시 같은 것을 갖춘 실용적인 컴플리케이션 complication을 선호한다. 반면 남성들은 크로노그래프 chronograph *역주: 시계와 스톱워치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시계처럼 하이테크 느낌을 가진 컴플리케이션을 좋아한다. 남성들이 스포츠카를 구매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파텍 필립 레퍼런스 7130G 레이디스 월드타임, 레퍼런스 5062/450 레이디스 하이주얼리 아쿠아넛, 레퍼런스 7000/250G 레이디스 미닛 리피터 .

샌드린(44)은 1995년부터 파텍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 후 수 년 간 여성용 시계 제작의 변화를 주도해왔다(그녀는 1932년부터 내려온 가업을 4번째로 물려받은 파텍 필립 회장 티에리 스턴 Thierry Stern과 결혼했다). 샌드린은 기술적인 혁신에 중점을 두되 제품의 아름다움과 디자인에도 신경 쓰면서, 남성용 시계와 함께 복잡한 기능을 갖춘 여성용 시계 제작에도 도움을 주어왔다.

코네티컷 소재 와인 컨설팅 기업 큐레이티드 셀러 Curated Cellar의 소유주 캐럴라인 윌리엄스 Caroline Williams는 11년 전 시계 경매에 참석한 후, 필립 파텍 시계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윌리엄스는 “처음에는 시계 역사나 배경에 관심을 가졌는데, 나중에는 시계 예술과 과학에 더욱 끌리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고전적인 제품과 현대적인 제품을 포함해 24개의 시계를 수집했다. 웬만한 남성 수집가의 컬렉션과 맞먹는 수준이다.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였다. “여러 명의 남성들과 회의를 할 때, 시계를 차고 있으면 그들이 먼저 알아본다. 사업을 할 때 시계는 좋은 연결고리가 된다. 나처럼 금발의 여자가 회의실 안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일단 선입견을 갖고 본다. 하지만 시계가 대화의 물꼬를 터준다. 또 하나의 공통 화제가 생기게 된다.”

최근까지도 여성용 명품 시계는 기본적으로 남성용 모델의 좀 더 작은 버전에 머물러 있었다. 단순한 쿼츠(석영) 배터리 무브먼트와 화려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다이얼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하지만 트웬티포 Twenty-4의 성공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남성용 시계 디자인을 재활용한 것이 아닌, 처음부터 여성용 시계로 제작한 제품에 대한 수요가 있음이 분명해졌다. 트웬티포는 쿼츠 배터리로 구동되는 파텍의 상징적 모델 곤돌로 Gondolo를 여성용으로 재해석한 모델이었다. 스턴은 “실제로 시계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알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그 후부터 회사는 다양한 기능을 갖춘 여성용 시계 부문의 확장을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스턴은 “우리는 가족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치나 분석 같은 것들을 기다릴 필요 없이 원하는 바를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샌드린 스턴이 필립 파텍 본사에서 제품 디자인을 살펴보고 있다.

전통과는 거리가 먼 아주 파격적인 행보는 아니다. 178년 전통의 파텍은 과거에도 아름다운 여성용 혁신 시계를 제작한 바 있다. 파텍은 1868년 헝가리 백작 부인 코스코비츠 Koscowicz를 위해 최초의 스위스 손목시계를 제작했다. 키로 태엽을 감는 팔찌형 손목시계였다. 1916년에는 (시간을 5분 단위로 알려주는) 여성용 파이브 미닛 리피터 Five Minute Repeater를 출시해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스턴의 사업적 직감은 옳았다. 필립 파텍은 1996년 남성용 애뉴얼 캘린더 Annual Calendar 모델을 출시한 후, 고객들로부터 아내와 여자친구가 ’자신의 시계를 차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파텍은 2005년 여성용 애뉴얼 캘린더를 출시했다. 그 후 (일정한 주기에 따라 뜨고 지는 달의 모양을 표시해주는) 문페이즈 moon phase, (버튼을 누르면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미닛 리피터, (2개의 초침으로 연속적인 시간 측정을 하는)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split second chronograph, 다이얼을 통해 시계 무브먼트를 볼 수 있는 스켈레톤 skeleton 시계 등 정교한 여성용 시계 컬렉션을 디자인해왔다. 2009년에는 레이디 퍼스트 크로노그래프인 레퍼런스 7101을 출시했다. 제품명이 말해주듯, 시계 무브먼트가 처음부터 여성용 모델을 위해 제작됐다. 이 모델은 이후 남성용 모델에 응용되기도 했다.

스턴에 따르면, 현재 파텍의 고객 비중은 남성 70%, 여성 30%다. 여성 고객 비중은 앞으로 더 늘어날 여지가 있다. 시장에서 여성용 시계 부문이 강세를 보이면서, 파텍은 지난 7월 다양한 한정판 여성용 컴플리케이션을 새롭게 선보였다. 11일 간 뉴욕에서 열리는 파텍필립 전시회(Grand Exhibition) 일정에 맞춰 다이얼에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양각해 내놓은 월드타임 레퍼런스 모델도 그 중 하나였다.

이 같은 현상은 단편적인 트렌드에 그치지 않고 있다. 브레게 Breguet, 해리 윈스턴 Harry Winston, 바쉐론 콘스탄틴 Vacheron Constantin을 비롯한 많은 명품 브랜드들이 특히 다양한 기능을 갖춘 고유의 여성용 무브먼트를 제작하고 있다. 시계 컨설턴트이자 저널리스트인 하일라바우어 HylaBauer는 “특히 미국 시장에서 브랜드들이 이 같은 변화를 새로운 기회로 보고 있다. 이들은 여성 고객의 관심과 수요를 간파했고, 여성용 시계와 무브먼트에 제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초의 스위스 손목시계. 파텍 필립이 1868년 제작해 8년 후 헝가리의 코스코비츠 백작 부인에게 판매했다.

시계 브랜드들은 여성 임원도 하나 둘씩 늘리기 시작했다. 명품 대기업 리치몬트 Richemont는 지난 3월 명품시계 및 주얼리 브랜드인 피아제의 글로벌 총괄로 셰비 누리 Chabi Nouri를 임명했다. 까르띠에 Cartier와 파네라이 Panerai를 비롯해 11개 시계 및 주얼리 브랜드를 보유한 리치몬트 그룹이 관련 부문 브랜드 최고 수장으로 여성을 임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반적으로 브랜드들이 여성용 시계 시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건 기계공학처럼 복잡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여성용 시계 부문이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 일단 수지타산이 맞기 때문이다. 이 부문이 아니었다면 시계 산업은 계속 침체상태였을 것이다. 스위스 시계산업 협회(Federation of the Swiss Watch Industry)에 따르면, 지난해 시계 수출은 10% 가량 줄어 수출액은 194억 달러에 머물렀다. 2009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가장 가파른 감소세였다. 제네바 소재 회계 감사 및 자문 기업 딜로이트 Deloitte의 스위스 명품 시장 담당 카린 세게드 Karine Szegedi는 “브랜드들이 시계에 대한 여성 고객들의 관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시장의 한 부문을 오랫동안 간과해왔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명품 시계를 남성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시대는 곧 종말을 고할 것이다. 샌드린 스턴은 “여성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독립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여성이 자기 자신을 위해 구매하는 물건 중에는 시계도 포함되어 있다. 아직 보편화된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될 날이 머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 / BY STACY PER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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