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베르세(왼쪽 두번째) 스위스 연방정부 대통령이 다보스포럼 개막을 이틀 앞둔 21일(현지시간) 다보스에서 개최한 사전 행사에서 포럼 창시자이자 회장인 클라우스 슈바프(〃 세번째)와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다보스=EPA연합뉴스
유럽연합(EU)을 강타한 겨울 폭풍으로 스위스 다보스의 1월은 어느 해보다 춥고 매서웠다. 취리히에서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알프스행 열차에 몸을 싣고 오를수록 눈으로 바뀌어 다보스 일대를 파묻을 기세로 몰아쳤다.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뼛속을 파고드는 다보스의 날씨에 부쩍 어두워진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의 올해 분위기까지 더해지며 ‘금융위기 10주년’을 맞이한 세계의 자화상을 다보스에서 읽게 되는 듯했다. 올해 다보스가 제시한 중점 논제들은 ‘인류가 극복한 위기’가 아니라 인류가 서 있는 ‘벼랑 끝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하다. 포럼이 올해 중점 논제로 제시한 △균형적 경제 발전 △다자 권력 시대의 탐험 △사회 양극화 극복 △기술지배 시대가 요구하는 시급한 전환 등은 무너지는 ‘글로벌질서(Global order)’의 암울한 모습과 미래를 담고 있다. 포럼은 ‘분열된 사회에서 공조의 미래찾기’를 주제로 세계가 이미 글로벌 질서로부터 ‘균열’되는 상황임을 직시하는 동시에 지금의 균열이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올해 포럼은 역대 최초로 ‘퓨처 쇼크’라는 세션을 신설해 미래 역기능을 진단하고 대처 방안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뒀다.
특히 현재 진행형인 4차 산업혁명에 관해서는 기술 발전 속도와 정부 거버넌스 사이의 균열로 자칫 기술의 속도전에 인류가 먹힐 수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4차 산업혁명 하에서 첨단 기술을 관리하려면 실시간으로 규율을 만들어 업데이트 또는 변용하며 다른 영역과의 협업 및 새로운 창조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각국 정부들의 거버넌스가 이에 못 미치면서 ‘지배의 공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보스는 기술 거버넌스의 현실화 없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각 업종별로 1~2개 기업 정도만 살아남는 ‘독점기업 사회’가 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기술혁명에 필수적으로 따르는 천문학적 투자를 감당하려면 더 큰 ‘규모의 경제’가 요구되며 이를 위한 기업 간 합종연횡 결과 기술혁명에서 살아남는 기업들은 특정한 국가가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업종별로 1~2개에 그치며 독점 기업화 수순을 걷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스마트폰 분야에서 애플과 삼성전자, 온라인 유통에서 아마존과 알리바바 등 이익을 내는 업체는 극히 소수다. 여기에 온라인 강자들이 다업종으로 확장하면서 기존 대기업들도 이종 기업과의 이색 합종연합에 몰두하는 등 규모의 경제가 커지며 진입장벽만 키우고 있다.
클라우스 슈바프 WEF 창설자는 포럼 개막에 앞서 홈페이지 헤드라인에 게재한 기고를 통해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접근 시각 자체를 바꿔야 한다”며 “윤리·도덕·일자리를 논하는 한담에서 벗어나 국가·국민·기업의 시급한 기술 혁명적 사고 전환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득보다 실이 더 클 것”이라는 다급한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결국 데이터 확보전쟁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를 독점한 미국 기업들과 막강한 자본으로 기술 매입에 열을 올리는 중국 등 주요2개국(G2)의 편중 현상이 더 심해질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포럼은 “기술 기업의 독점시대에 시장 참여자들이 해법을 찾아낼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며 수위를 더하는 양극화, 불평등, 국가별·계층별 격차 관련 세션들을 잇달아 편성했다. 앞서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현재 사회 불평등 지수가 역대 최고 수준임을 거론하며 “글로벌 부유층 10%의 세금 5%를 올리는 ‘글로벌 뉴딜’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과도하게 풀린 유동성이 늘 역풍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자산 거품 우려와 이로 인한 재정 위기 촉발 가능성도 힘을 받고 있다. WEF에 따르면 미 주식시장에서 현재보다 주가가 높았던 시점은 환산 주가로 비교할 때 1929년 대공항 직전과 2000년 인터넷 버블 당시 등 단 두 차례뿐이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미국·유럽·일본 등의 긴축 흐름이 다음 위기 가능성에 따른 선제적 대비책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글로벌 질서의 균열은 산업이나 금융 분야만의 문제는 아니다. 보호주의가 각국에서 성행하면서 세계화와 민주주의, 자본주의 등 인류가 20세기 이래 닦아온 각종 글로벌 질서에도 균열이 오고 있다. 민주주의는 보호주의 물결과 만나 포퓰리즘으로 흐르며 이성보다 감성에 지배되는 ‘포스트 트루스(post-truth·탈진실)’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자본주의 역시 양극화와 불평등 심화로 ‘렌트 자본주의(불로소득층의 지배 강화)’가 키워드로 등장했다. 미국과 영국에 이어 경기 회복세가 보이자 난민 단속 강화부터 언급한 프랑스, 우파가 연정에 참여했거나 가능성을 높이는 오스트리아·이탈리아 등 반세계화의 물결 역시 세계에서 예외를 찾기 힘들게 됐다.
슈바프 WEF 창설자는 “기술변화와 사회 변화의 전환점에서 올해는 국가와 기업에 매우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라며 “이런 때일수록 가장 중요한 기업전략이라면 사람에 대한 투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보스=김희원기자 heew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