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방의 주인인 정운찬(71) 전 국무총리는 “최근 들어 야구책을 몇 권 다시 읽었다. 하나는 기자 출신 국흥주 선생이 쓴 ‘운명의 9회말’이고 또 하나는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캐슬린 스티븐스가 귀국하면서 주고 간 ‘베이스볼 애즈 아메리카’”라고 말했다. “운명의 9회말은 고교야구 얘기가 많고 베이스볼 애즈 아메리카는 미국 문화 그 자체로서의 야구 얘기인데 오랜만에 그 두 책을 정독했어요.”
정 전 총리가 야구책을 다시 꺼내 든 시점은 그가 임기 3년의 KBO 총재로 추대된 지난해 11월 말부터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서울대 총장을 거쳐 국무총리를 지냈고 대권에도 도전했던 그는 지난달 3일 국내프로야구를 관장하는 수장인 KBO 총재에 취임했다.
정 총재를 서울 관악구의 동반성장연구소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 2012년 창립한 이곳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 총재는 “KBO 총재가 된 뒤 부서마다 전 인원이 참석하게 해서 업무보고를 받았고 야구 원로들도 뵀다”며 “야구를 예전부터 좋아하기는 했지만 KBO에 대해서는 잘 몰랐기 때문에 정말 바쁘게 배워가고 있다”고 했다.
정 총재는 취임 후 2주도 안 돼 타이틀 스폰서 계약을 마무리해 화제를 모았다. 신한은행과 맺은 3년 240억원은 국내 프로스포츠 리그 스폰서 역대 최대 규모 계약이다. 정 총재가 경제학자·국무총리 등으로 활동하며 쌓은 인맥이 계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얘기가 많다. 정 총재는 “KBO의 마케팅 기구인 KBOP가 일을 잘한 것일 뿐”이라며 스스로를 낮췄다. “다만 지난해 KBO에서 (심판의 일탈 행위, 선수 도박·음주 등) 불미스러운 일이 여럿이었으니 품위 있는 곳하고 계약하면 좋겠다는 얘기는 했죠. 은행이 타이틀 스폰서로 들어온 것은 처음인데 은행은 신뢰가 최우선 아닙니까. ‘클린 베이스볼’을 향한 KBO의 의지와도 이미지가 맞아떨어진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1980년대 초반부터 강의시간에 ‘금융계 취업할 학생들은 신한은행에 지원하라’는 얘기를 많이 했어요. 재일동포 자본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당시에 다른 은행들보다 대출 심사 등에서 정부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웠거든요. 오래전부터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곳과 함께 가게 돼 더 기쁩니다.”
정 총재는 취임식 때 “연봉을 받고 일할 것이며 KBO 수익 증대로 인센티브도 받고 싶다”고 했다. KBO 총재의 연봉은 3억원 정도로 추정되는데 그동안 인센티브를 받은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인센티브 발언에 대해 정 총재는 “KBO가 수익성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TV 살 때 큰돈을 들이는 게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서비스에 대해서는 공짜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제공 받는 서비스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분위기가 국내프로야구에 정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KBO의 산업화를 강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내프로야구는 지난해 최초로 840만 관중을 돌파하며 국민스포츠로의 위상을 더욱 공고하게 쌓았다. 그러나 각 구단은 여전히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구단들이 적자 폭을 줄이고 나아가 흑자운영을 실현하기 위한 묘수는 없을까. 정 총재는 ‘동반성장’과 ‘미국프로풋볼리그(NFL)’를 키워드로 제시했다. “모기업 의존을 벗어나 예를 들면 롯데 자이언츠 주식회사식으로 야구계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야구장 규모를 키워서 입장료도 높이고…. 중계권도 중요하죠. 또 타이틀 스폰서 금액도 더 노력하면 늘릴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각 구단의 개별적인 노력을 바라기보다는 통합마케팅을 해야 합니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자는 거죠. 입장권·유니폼 판매를 통합해서 진행한다면 단위생산비를 줄일 수 있어서 수익이 올라갈 겁니다.” 정 총재는 “구단과 구단, 구단과 선수, 선수와 선수, 프로와 아마추어 간 동반성장이 필요한데 KBO 총재직을 받아들인 큰 이유도 바로 동반성장을 추진하는 데 있다”며 “NFL의 통합마케팅이 동반성장과 잘 통한다. 메이저리그는 물론 미국 정부도 NFL의 동반성장 모델을 도입할 예정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소개했다.
NFL은 전체 32개 팀 중 적자 구단이 한 팀도 없다. 정 총재는 “NFL은 입장권 총수입의 40%를 32개 구단에 동일하게 나눠줘 구단별 수익 불균형을 최소화한다. 중계권과 라이선싱 상품·광고도 리그 차원에서 통합 관리해 전 구단에 균등하게 분배한다”며 “모든 팀이 수익을 내니까 좋은 선수를 영입할 수 있고 이는 어느 팀 관중이든 우승 기대를 품을 수 있는 선순환으로 연결된다”고 했다.
NFL식 통합마케팅의 실현에서 가장 큰 숙제는 구단 간 입장 차를 좁히는 것이다. 정 총재는 “당장 지금 인기 있고 살림 잘하는 구단은 반대할 수 있다. 그러나 통합마케팅을 하면 그 구단도 지금보다 훨씬 큰 수익을 낼 수 있다”면서 “각 구단 단장분들부터 구단주분들까지 만나서 계속 설득을 해나갈 것이다. 3년을 보고 있는데 제 임기 동안 적어도 기초를 세우고자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전문 컨설팅 업체에 연구용역을 맡기는 방안도 적극 검토하고 있다.
구단들의 수익 증대를 가로막는 규제를 현실화하는 것도 정 총재의 과제다. 그는 “완전한 규제 철폐론자는 아니지만 서울 연고팀들이 홈구장을 쓰면서 서울시에 사용료를 내고 광고권도 서울시가 거의 다 가져가는 지금의 구조는 고쳐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메이저리그의 로스앤젤레스(LA) 다저스는 1958년에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연고를 옮겼죠. 당시 LA시는 단돈 1달러에 다저스 구단에 땅을 넘겼어요. 프로야구가 서울시민들에게 주는 즐거움을 생각하면 구단이 오히려 서울시로부터 보조를 받아야 하는 거죠. 지금은 구장의 화장실 개선이나 음식점 다양화·고급화 계획도 모두 서울시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구조라서 이 부분은 꼭 손질이 필요합니다.”
야구계가 먼저 달라져야 할 부분도 언급했다. 프로야구는 인기스포츠에 걸맞게 톱클래스 선수들의 연봉이 10억원을 가볍게 넘는다. 수십억원의 계약금까지 따라오는 자유계약선수(FA) 시장은 늘 과열됐다는 비판을 받지만 고쳐지지 않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식의 축소 발표를 일삼는 구단도 많은 상황. 정 총재는 “야구와 야구선수를 좋아하는 팬의 한사람으로서 선수들이 월급을 많이 받아가는 것이 싫지는 않다. 그러나 구단의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계약이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이라며 “미국·일본과 비교한 우리 야구 시장의 크기를 생각하면 FA 시장이 지나치게 커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FA 제도 자체에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 샐러리캡(연봉 총액 상한제) 또는 사치세(전력평준을 위한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본다”고 분명히 밝혔다.
일각에서는 KBO리그의 경기력 수준이 매년 높아지기보다 오히려 퇴보한다고 지적한다. 정상급 투수는 해마다 줄어들고 경기 중 실수와 실책이 많아져 경기 시간만 길어진다는 것이다. 정 총재는 “저변을 넓히되 기본을 먼저 가르치는 야구가 정착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투수가 약한 것은 어릴 때부터 혹사를 당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기는 데만 치중하는 문화가 있다 보니 고등학교 때 이미 몸이 상해서 프로에 들어오고 몇 년 안 돼 수술하는 선수가 많다”며 “어릴 때는 승부보다는 즐기는 야구에 익숙해지도록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화제를 돌려 골프 얘기를 꺼내보려 했더니 정 총재는 손사래를 쳤다. “미국 유학 때랑 영국에 살 때 연습장에 한두 번 가본 게 전부예요. 봄·여름·가을 내내 야구장 가서 보거나 TV 중계를 붙들고 살았는데 골프 배울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골프까지 쳤으면 미국에서 박사도 못 따왔겠죠.”
정 총재는 소문난 야구광이자 신임 KBO 총재로서 품고 있는 ‘로망’도 소개했다. 그는 “국내 구단은 지금의 10개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앞으로는 양적 성장보다 질적 발전을 꾀할 때”라며 “메이저리그의 인터리그처럼 시즌 중에 치르는 동북아리그를 추진하고 싶다”고 했다. “한중일·대만에 필리핀도 참가하는 동북아시아리그를 한 시즌에 몇 경기씩이라도 해나가면 야구 보급이라는 측면에서도 꽤 효과가 클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팬들 입장에서도 새로운 볼거리가 될 수 있고요. 어떻게 하면 야구가 대한민국에 ‘힐링’을 선물할지 다양한 분들과 계속 고민해나갈 생각입니다.”
/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사진=송은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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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공주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마이애미대 경제학 석사, 프린스턴대 경제학 박사 △1976년 미국 컬럼비아대 조교수 △1978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1998년 한국금융학회 회장 △2002년 서울대 총장 △2006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2009년 국무총리 △2010년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2011년 서울대 명예교수 △2012년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 △2018년 KBO 총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