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와 차량에 오르고 있다. /의왕=송은석기자
지난해 8월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던 이 부회장이 이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선 형량을 좌우하는 재산국외도피·범죄수익은닉죄가 대부분 무죄로 뒤집혔기 때문이다. 2심은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삼성 계열사 출연금 204억원은 물론 1심에서 유죄였던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금도 무죄로 봤다. 무엇보다 2심 판결에서는 ‘삼성 경영권 승계의 묵시적 청탁’이라는 1심의 유죄 논리가 깨졌다. “승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변호인단의 끈질긴 주장이 빛을 발한 셈이다.
2심이 유죄로 인정한 뇌물액수는 승마 지원 용역으로 삼성전자가 코어스포츠에 실제 지급한 36억3,484만원에 불과하다. 1심의 89억원에 비해 절반 이하로 줄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의 공소장에 적힌 433억원 중 93%가 무죄다. 2심은 또 1심과 달리 살시도·비타나·라우싱 등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가 사용한 마필 대금도 뇌물에서 제외했다. 특검은 삼성이 마필을 최씨에게 줬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최씨가 마음대로 사용만 했을 뿐 실제 소유권 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대신 액수를 측정할 수 없는 마필·차량 무상 사용 이익만 최씨의 뇌물수수로 판단했다.
최씨가 실질적으로 지배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삼성이 낸 후원금 16억2,800만원도 무죄로 뒤집혔다. 1심의 유죄 판단 근거인 ‘묵시적 청탁’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재센터 후원금과 재단 출연금은 제3자 뇌물죄로 기소됐다. 제3자 뇌물죄가 성립하려면 이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승계와 관련한 부정한 청탁을 했고 박 전 대통령이 그 대가로 제3자인 최씨에 대한 뇌물공여를 지시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승마 지원에 걸려 있는 단순뇌물죄는 뇌물이 오간 사실과 수수자·공여자 사이에 대가관계만 있으면 부정청탁 없이도 유죄로 인정된다.
묵시적 청탁은 이 부회장이 말은 안 했어도 이심전심으로 경영권 승계를 도와달라고 박 전 대통령에 청탁했다는 논리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의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라는 포괄적 현안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승계작업의 추진에 관해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없으므로 ‘묵시적 부정한 청탁’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삼성 변호인단은 1심부터 줄기차게 “승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왔다.
특검도 ‘포괄적 현안’ 개념의 애매모호함을 해소하기 위해 2014년 9월12일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이른바 ‘0차 독대’를 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개별 현안의 구체적 청탁이 있었다는 점을 입증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재판부는 ‘0차 독대’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더구나 특검은 0차 독대에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도 제시하지 못했다.
‘묵시적 청탁’을 부정한 판단에 더해 재판부는 재산국외도피·범죄수익은닉 혐의도 대부분 무죄로 뒤집었다. 재산국외도피액은 액수가 50억원을 넘으면 무기징역까지 가능한 중범죄다. 1심은 뇌물공여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며 이에 따르는 재산국외도피·범죄수익은닉도 대부분 유죄로 인정했다. 이는 이 부회장의 징역 5년 형량 결정에 큰 영향을 줬다. 하지만 2심은 “삼성이 코어스포츠에 용역비로 보낸 36억원은 뇌물로 준 돈일 뿐 이 부회장이 차후 사용하기 위해 국내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 게 아니다”라며 무죄 판결했다.
이 부회장을 박 전 대통령과 최씨에게 뇌물을 적극적으로 공여한 주범이 아니라 겁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뇌물을 준 피해자로 본 것도 양형에 영향을 줬다.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승마 지원이) 뇌물임을 인식하면서도 박 전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한 채 뇌물공여로 나아간 것으로 보여진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형사법 체계는 뇌물공여자보다 수수자에게 책임을 무겁게 지운다”고 지적했다. 재판부에 따르면 현행 형법 133조 1항 뇌물공여죄의 법정형은 징역 5년 이하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이며 가중처벌 규정도 없다. /이종혁기자 2juzs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