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의 국내 전사들 ¦ 함기호 한국HPE 대표

“‘HPE 넥스트’ 프로그램 가동 미래 혁신기술 선도하겠다”
4차 산업혁명 기반 기술과 에코시스템 구축
신개념 컴퓨터 ‘더 머신’도 2년 내 상용화한다

이 콘텐츠는 포춘코리아 2018년 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한국HPE 본사에서 만난 함기호 대표

▶함기호 대표는 1997년 한국HP에 입사했다. 전략기획과 마케팅, 영업 등을 두루 거쳐 2011년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2015년 글로벌HP가 HPE와 HP INC. 두 개 회사로 분리된 후 한국HPE 대표로 일하고 있다. HPE는 기업용 서버·스토리지·네트워킹 장비 판매와 지원 사업을 벌이고 있다. 현재 HPE는 미래 먹거리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 ‘HPE Next’라고 불리는 내부 혁신 프로그램으로 회사 체질을 바꾸고 있다. 오랫동안 개발해 온 혁신 제품도 머지않아 출시될 것으로 보인다. 광속으로 바뀌고 있는 변화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주도권을 잡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함기호 대표를 만나 HPE가 미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들어봤다. 서울경제 하제헌 기자 azzuru@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서울시 여의도동 한국HPE 본사 사무실 로비에는 사람들이 여럿 서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뒤로 세미나를 공지하는 작은 입간판이 보였다. 지난해 사무실을 옮긴 한국HPE는 무척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로비에서 빠져나와 커다란 회의실로 들어갔다. 함기호 한국HPE 대표가 앉아 있었다. 얼굴을 익힌 사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함 대표가 먼저 말을 꺼냈다. “밖이 조금 어수선하죠? 조금 전 세미나가 끝났나 봅니다. 기술 변화가 빨라 부지런히 공부해야 따라갈 수 있어요. 그래서 요즘 세미나를 자주 열고 있습니다.”

글로벌HP 본사는 2015년 큰 변화를 겪었다. 당시 HP를 지휘하던 여전사 맥 휘트먼(2018년 1월 1일 자로 HPE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안토니오 네리 HPE 사장이 휘트먼의 뒤를 이었다)이 큰 결단을 내렸다. HP를 HPE(Hewlett Packard Enterprise)와 HP INC. 두 개 회사로 쪼갠 것이었다. 기업 고객에게 서버·스토리지·네트워킹 장비를 판매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HPE와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PC와 프린터를 판매하는 HP INC.로 사업영역을 분할한 것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경제 전문매체들은 ‘세기의 기업 분할’이라며 대서특필했다. 현 HPE 이사회 멤버이자 전 HP 회장인 레이 레인은 미국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HP의 전성기는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하지만 맥 휘트먼이 들어오면서 다시 한번 그때의 영화를 떠올릴 수 있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HPE와 HP INC. 입장에선 부인하고 싶겠지만, HP에겐 한때 ‘늙은 공룡’ 취급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분명한 건 그 모두가 이젠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HPE 혁신의 역사


혁신을 위한 준비, ‘HPE Next’

HP 본사의 결정은 당연히 전 세계 브랜치에도 영향을 미쳤다.한국HP도 2015년 한국HPE와 HP코리아로 분할이 결정됐다. 2011년 한국HP 대표에 취임한 함기호 대표는 HP가 두 회사로 분리된 후 한국HPE 대표 자리를 맡았다. 함 대표는 복잡한 기술 이야기는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HPE가 어떻게 사업을 시작했는지, 얼마나 영광스러운 날들을 보냈는지를 줄줄이 설명해나갔다. 이어 HPE가 현재 중요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들, 향후 기업 비즈니스가 나아갈 방향 등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함 대표는 HPE가 빠르게 변하고 있는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HPE Next’ 프로그램을 가동 중이라고 말했다. “HPE Next는 일종의 조직 혁신 프로그램입니다. HPE가 경쟁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도록 체질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죠. HPE Next는 3단계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함 대표가 설명한 첫 번째 단계는 ‘단순화’였다. 우선 HPE는 판매 제품 종류를 40% 가량 줄였다. 이를 통해 전 세계에 있던 생산공장 17개를 7개로 줄일 수 있었다. 인수합병 때마다 덕지덕지 붙였던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도 깔끔하게 통합해 정리하고 있다. 회사 내에 쌓아두고 있던 데이터들도 클라우드로 옮기고 있다.

두 번째는 ‘효율성과 실행력 강화’다. HPE는 우선 의사결정 과정을 줄였다. 기존 3개 지역본부(미국, 유럽, 아시아태평양) 체제를 폐지하고, 대신 본사와 직접 의사소통을 하는 11개 지역 체제를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보면 본사와 지역 말단 직원 사이 의사소통에 필요한 과정을 8단계에서 4단계로 절반이나 줄인 것이었다. 그 밖에도 HPE는 160개에 달했던 지사를 절반 이하인 76개로 축소시켰다.

함 대표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3년에 걸쳐 진행될 예정인 HPE Next의 최종 단계는 혁신입니다. 제가 조금 전 설명한 HPE Next의 두 단계 조치로 절감한 비용을 인력과 기술, 제품 개발에 투자하는 거죠. HPE Next는 회사의 미래를 더욱 번창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사실 HPE가 처한 사업 환경은 그리 녹록치 않다. 많은 기업들이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업체를 활용해 클라우드로 데이터를 이전하고 있다. 그 와중에 HPE는 사내에 저장 공간을 구축하려는 기업들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이 시장에서 HPE는 델 EMC, 시스코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함 대표는 이 같은 상황을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기업 IT 인프라 환경이 점차 ‘하이브리드 IT’로 바뀌고 있다는 게 함 대표의 설명이다.

함 대표는 말한다. “비즈니스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요. 그에 맞춰 기업 IT 인프라도 민첩하게 대응해줘야 합니다. 하이브리드 IT는 기업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IT 자산을 버리지 않고 새로운 IT 서비스와 혼합해 사용하는 걸 뜻합니다. 유연한 IT 인프라 구축 방법이죠. ‘하이브리드 클라우드’도 그런 케이스에 해당합니다. 기존에 회사가 가지고 있던 스토리지나 서버를 최적화시켜 새로운 클라우드 서비스와 함께 사용하는 거죠. 무척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시장조사업체 IDC 조사에 따르면, 한국 기업들의 하이브리드 클라우드 도입률은 55% 정도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조사 대상 31개국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HPE는 기업의 디지털화를 지원하고 이를 통해 성공적인 사업 성과를 얻을 수 있게 지원하는 기술서비스 조직 ‘포인트넥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2만 5,000여 명에 달하는 전 세계 HPE 기술서비스 인력들이 클라우드 컨설팅부터 IT 인프라 운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한국HPE에선 총 인력 700여 명 중 10%인 70여 명이 포인트넥스트팀으로 활동하고 있다).

함 대표는 말한다. “기업마다 디지털화 과정이 다릅니다. 따라서 기업은 문제 해결을 위한 효과적인 방법을 제공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포인트넥스트는 다양한 기업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최적의 솔루션을 빠르고 정확하게 제공하고 있습니다.” HPE는 자신이 가진 전문 분야는 강화하고 부족한 부분은 SAP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맺어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다. 혼자 모든 걸 다 먹어치워 몸집만 커진 공룡이 종국에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지 잘 알고 있는 HPE다운 발상이다.


미국 콜로라도주 포트콜린스에 위치한 HPE 연구소에서 ‘더 머신’ 시제품을 점검하고 있는 엔지니어들


HPE의 비밀 병기, ‘더 머신 The Machine’

HP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HPE는 지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HPE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언급되기 전 ‘아이디어 이코노미(Idea Economy)’라는 표현을 써 왔다. 함 대표는 말한다. “HPE가 말하는 아이디어 이코노미는 4차 산업혁명과 같은 맥락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아이디어를 비즈니스로 연결하는 것이 기업 IT 인프라의 핵심 역할이라는 뜻이 담겨 있죠. 칼리 피오리나 전 HP 회장이 2000년대부터 하던 이야기입니다. 당시엔 아이디어에 불과했던 것들이 기술 발전에 따라 지금 현실로 만들어지고 있는 거죠.”

4차 산업혁명 추세에 따라 많은 기업들이 IT 인프라를 확장하고 재구성하는 ‘디지털화’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컴퓨터 하드웨어는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사물인터넷(IoT) 등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불거진 문제다. 빅데이터, 클라우드, IoT 그 무엇이건 이면에는 컴퓨팅 환경이 필요하다. 특히 IoT 영역이 넓어지면서 일상생활에서 더 많은 컴퓨팅 활동이 일어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는 2020년에는 전 세계 컴퓨팅의 약 40%가 개인들의 실생활에서 이뤄질 것으로 예측한 바 있다. 거기서 나오는 방대한 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할 지에 관한 업계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HPE 슈퍼돔 플렉스. 세계에서 확장성이 가장 뛰어난 모듈형 인메모리 컴퓨팅 플랫폼이다.

HPE 아폴로 2000 Gen10. 말단 컴퓨팅 환경에서 딥러닝 추론을 가능케 하는 시스템이다.


함 대표는 말한다. “HPE는 컴퓨팅 하드웨어의강자입니다. 4차 산업혁명의 그 어떤 요소도 컴퓨팅 기술 없이 완성되지 못해요. 그만큼 HPE가 해야 할 역할이 많아진 시대가 왔다는 뜻이죠. HPE는 이 같은 변화를 파악하고 컴퓨팅 능력을 높이기 위해 일찌감치 연구에 돌입했습니다.”

2011년 HP CEO에 취임한 맥 휘트먼은 HP 실험실에 들러 ‘판매할 만한 제품이 있는지’를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엔지니어들은 2003년부터 비밀 실험실에 보관돼 있던 신기한 제품 하나를 보여줬다. 저장 공간이 160 테라바이트(노트북 2만 대 처리 용량에 해당한다)인 일종의 슈퍼컴퓨터였다. 이들은 그 컴퓨터를 간단히 ‘더 머신(The Machine)’이라 불렀다. 당시 맥 휘트먼은 더 머신을 보고 “기대는 굉장히 크지만 일단 상용화에 성공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더 머신은 HPE 역사상 최대 규모의 연구개발(R&D) 프로젝트다. 최종 개발에 5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현재 컴퓨터는 CPU가 연산을 담당하고 메모리가 저장을 한다. 둘 사이 연결은 회로판에 새긴 구리선이 맡는다. CPU와 저장장치가 따로 있고 구리선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속도나 용량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5월, HPE는 더 머신 시제품을 공개했다. 더 머신은 데이터 전송과 처리를 인간의 뇌처럼 빠르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람의 뇌는 연산과 저장을 동시에 처리한다. 둘 사이의 연결은 신경세포가 담당한다. 그래서 더 머신은 인간의 뇌를 본떠 설계했다.

함 대표는 더 머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더 머신은 큰 메모리 풀(pool) 안에 CPU들을 에워싸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메모리와 CPU 사이 연결은 ‘포토닉 링크’를 사용하죠. 포토닉 링크는 HPE가 개발한 일종의 광전송 기술인데 이미 제품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호를 빛으로 연결하기 때문에 구리선을 이용한 전송 속도보다 최대 10만 배 빠릅니다. 더 머신은 기존 컴퓨터보다 처리속도가 1만 배 이상 빨라질 겁니다.”

오랫동안 실험실에서 근무한 HPE 연구원들은 더 머신이 레이저제트 프린터 이후 HPE가 내놓은 최대 혁신제품이라 말하고 있다. HPE는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는 딥러닝과 의료 분야에 더 머신을 활용할 계획이다. HPE 연구진은 더 나아가 미래 화성 탐사에도 더 머신이 활용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HPE는 제품 개발을 지속해 2020년까지 더 머신을 상용화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함기호 대표는 “HPE Next는 일종의 조직 혁신 프로그램”이라며 “HPE가 경쟁 시장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도록 체질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8년 차 대표 함기호의 인생 역정

한때 한국HP는 ‘IT 사관학교’로 불렸다. 문자 그대로 수많은 IT 인재들의 산실이었다. 그렇다면 함 대표는 어떻게 HPE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그는 길을 조금 돌아 1997년 한국HP에 입사했다. 남다른 이력 때문에 HP아시아태평양지역본부 마케팅 담당(부장)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함 대표는 서울대학교 기계설계학과 3학년 재학 중 미국 USC 기계공학과로 학사 편입했다. 그는 이후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기계공학 석사를 취득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1987년 LG산전 연구소에 입사해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함 대표 부친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함 대표는 말한다. “LG산전 연구소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함께 일해보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 말씀을 따랐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 회사가 삼익악기에 팔려 저도 삼익악기로 옮겨가게 되었어요.”

1993년경 함 대표는 삼익악기 계열사 대표이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 때 함 대표는 30대 중반이었다. 본사와 연락업무, 자금관리, 생산 및 품질 관리, 영업, 노사 문제 등 대표가 감당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함 대표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국 중소기업 대표들은 참 힘들게 일합니다. 이 일을 계속 할 것인지, 10~20년 후 제 미래에 대해 고민이 생기더군요. 그러던 중 삼익악기 오너 회장님이 갑작스럽게 암으로 별세하셨습니다. 그분 아드님이 회장으로 앉았는데, 경영 수업이 제대로 안돼 있는 상태였어요. 저는 그걸 보고 대표직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게 벌써 1996년의 일이군요.” 그 얼마 후 외환위기가 터져 삼익악기는 결국 부도를 맞았다.

함 대표는 당시 맥킨지나 앤더슨 같은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이가 너무 많아 일하기 힘들 거라는 선배들의 조언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컨설팅 회사에 문을 두드려 봤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러던 중 삼익악기에 있을 때 함께 일했던 직원 한 명과 연락이 닿았다. 그가 다니고 있던 곳이 한국HP였다. 함 대표는 말한다. “그분이 저보고 한국HP에 와서 일해보라고 하더군요. 사람 뽑고 있다고요. IT에 대한 전문지식도,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한 경험도 없어 처음에는 망설였어요. 결국 면접을 봤는데 출근하라고 하더군요.”

당시 함 대표를 뽑았던 임원은 HP아시아태평양지역본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지역본부의 리더가 될 인재를 원하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CEO를 맡았던 함 대표의 경험이 큰 점수를 딴 중요한 요소였다. 당시 함 대표를 뽑은 임원은 “IT는 회사에서 얼마든지 배울 수 있지만, CEO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라며 그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고 한다.

1997년은 한국HP가 최고 전성기로 내달릴 때였다. 사상 처음으로 매출 1조 원을 달성한 것도 그때였다. 삼성전자와도 활발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마디로 최고의 제품을 갖고 최고의 고객과 일한 ‘좋은 시절’이었다. 함 대표는 이후 세일즈와 마케팅을 총괄하게 됐다. 당시 한국HP 마케팅부서는 전략기획과 홍보 업무까지 관장하는 조직이었다. 함 대표는 그때 최고위 경영진들과 가까운 거리에서 일하면서 회사 전체 운영 상황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다. 함 대표는 말한다. “회사 데이터를 다 볼 수 있는 자리였어요. 저도 열심히 하면 대표가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하게 됐습니다.”

목표를 크게 잡은 함 대표는 글로벌 기업의 꽃인 영업직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2년 만에 기회가 생겼다. 회사에 ‘삼성사업부’ 영업매니저 자리가 나왔다. 삼성사업부는 한국HP 내에서도 정예 직원들이 모이는 부서였다. 당시 한국HP 대표는 영업 경험이 없다며 함 대표의 부서 이동 요청을 거부했다. 함 대표는 3박 4일 동안 대표를 설득했다. “결국 대표님이 허락을 해주셨어요. 그런데 제가 가니까 삼성사업부 팀원들이 출근을 안하더군요. 영업경험 없는 다른 부서 사람이 매니저로 들어왔다고 반발한 거였죠. 뭐 어쩌겠어요. 열심히 했죠. 꾸준히 실적이 나오자 (결국엔 저를) 인정을 해주더라고요. 그 후엔 제조사업부, 통신사업부, 공공사업부, 채널사업부 등 여러 사업들을 맡을 수 있었습니다.”

영업능력을 인정받은 함 대표는 2007년부터 한국HP 차기 대표로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한국HP 대표 자리가 코앞에 다가왔다고 생각했을 때쯤, 영국HP 지사장 출신 대표가 한국HP 대표로 파견됐다. 한국HP 대표가 되기 위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오던 함 대표는 그 순간 꿈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향후 진로에 대해 고민에 빠졌지만, HP 내에서도 꽤 영향력이 높은 신임 대표에겐 배울 점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학습 기회로 삼기로 했죠. 그 분이 한국에 오시면서 2년 내 본인은 물러날 것이며, 한국 사람에게 대표 자리를 맡길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정말 2년 안에 제게 대표직을 물려주고 떠나셨습니다.” 2011년 함 대표는 그렇게 한국 HP 대표로 부임할 수 있었다.

길었던 인터뷰를 마치면서 함 대표에게 한국 시장에서의 계획을 물었다. “4차 산업혁명으로 큰 변화를 맞고 있는 기업들 중에는 ‘어떤 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곳들이 꽤 많아요. 그에 대한 자문이나 지원을 해주는 기업으로 거듭나는 게 한국HPE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4차 산업혁명 구현에 필요한 기반 기술과 에코시스템을 구축해 제공할 겁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최적화된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전사적인 노력을 기울일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함기호 대표의 리더십과 앞으로 펼쳐질 한국HPE의 활약에 큰 기대감을 갖게 됐다.




■ 한국HP가 걸어온 길

1984년 HP와 삼성전자가 조인트벤처를 설립하면서 만든 문서와 당시 서명에 사용한 만년필.


HP가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딘 건 1977년이다. 삼성전자가 사내에 HP사업부를 만들면서다. 이때 삼성전자는 HP 제품을 국내 시장에 판매했다. 정식으로 한국에 진출한 건 1984년이다.
자본금 81억 원으로 HP(55%)와 삼성전자(45%)가 조인트벤처로 삼성-HP를 설립했다. 삼성-HP는 1985년 경기도 안양에 공장을 설립한 이후 사무용 컴퓨터를 생산하며 국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95년 영업상 이유로 회사명을 한국HP로 바꿨다.
HP는 제품 판매에 그치지 않고 한국 경제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했다. 삼성-HP 시절엔 세계 각지의 HP 현지 공장에 한국산 반도체, 모니터, LCD 등을 수출해 1993년 ‘1억 달러 수출 탑’을 수상한바 있다. 또 1997년 말 외환위기로 한국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HP 본사로부터 총 3억7,000만 달러를 유치하기도 했다. 외환위기로 부도가 난 고려증권 사옥(구 고려파이낸스빌딩)을 달러로 인수해 15년간 사옥으로 사용했다. 해외 법인용 건물을 사지 않는 HP로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1998년엔 삼성전자가 보유하고 있던 한국HP 지분을 100% 인수했다. HP는 현금이 말라붙었던 삼성전자에게 프리미엄까지 얹어 달러로 지분 인수 대금을 결제했다. HP는 SK그룹에도 1억 5,000만 달러를 융자해 줬다. 당시 환율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한국HP는 2년간 1,200대 1로 환율을 고정해 영업했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고객들이 꼭 필요한 제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 ‘한국HP 금융주식회사’를 설립해 전산화 및 인터넷 관련 정보인프라 구축 자금이 부족한 한국 기업들에게 프로젝트 금융을 지원하고 국내 벤처기업 투자도 진행했다.


■ 한국HPE 소사

1977.01
삼성전자 ‘HP사업부’로 한국 진출.
1984.09 삼성전자와 함께 조인트벤처 ‘삼성-HP’ 설립.
1995.03 삼성-HP에서 ‘한국HP’로 사명 변경.
1997.10 10억 달러 매출 달성.
1998.05 삼성전자가 소유했던 한국HP지분 100% 인수.
1999.11 에질런트테크놀러지(Agilent technology) 분사.
2002.05 컴팩(Compaq) 합병( 2002.10 한국HP가 컴팩코리아 합병).
2008.05 EDS 합병.
2015.11 HPE 출범.


■ 실리콘밸리를 탄생시킨 HP

1963년 HP 공장을 방문한 빌 휴렛(왼쪽)과 데이비드 팩커드.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1939년 회사를 차릴 당시 연구실로 사용하던 차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실리콘밸리가 낳은 세계 초일류 기업 HP의 성공신화를 기리기 위해 이 차고에 ‘실리콘밸리의 탄생지(Birthplace of Silicon Valley)’라는 명칭을 부여하고 역사적 기념 명소 제976호로 지정했다.


1939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팰로 앨토(Palo Alto)의 한 차고에서 설립된 HP는 미국 실리콘밸리를 탄생시킨 주역이다. HP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안착한 기업의 시조로 꼽히며 세계 벤처기업 1호로도 불리고 있다. 젊은 엔지니어 빌 휴렛(Bill Hewlett)과 데이비드 팩커드(David Packard)가 창업을 준비한 차고는 캘리포니아 주 정부가 ‘실리콘밸리의 탄생지’라는 이름을 붙여 유적지로 지정해 보존하고 있다.
1935년 스탠퍼드대학교 전기공학부 졸업생인 빌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는 세계 경제 대공황 기간 중, 스승인 무선공학과 프레데릭 터만 교수로부터 지원을 받아 1939년 정밀 음향 발진기 개발에 성공했다. 온도와 습도 등 주위 환경이 변해도 원음을 자동으로 재생시키는 시스템이었다. 당시 터먼 교수는 우수한 졸업생이 미국 동부의 유명기업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자신의 고향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기업을 세우게 했다. 정밀 음향 발진기를 대량 구입한 업체는 극장에 ‘판타지아’라는 만화 영화 상영을 위해 서라운드 사운드시스템을 구축한 월트디즈니사였다. 당시 경쟁업체들은 음향 발진기를 200달러에 판매하고 있었지만 휴렛팩커드는 54달러에 납품해서 가격 우위를 지켰다. 200시리즈로 알려진 이 음향 발진기는 33년 동안 판매되면서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팔린 기초전자제품이 되었다.
HP는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발진기, 전압계, 신호발생기, 주파수계산기, 온도계, 표준시계와 같은 전자계측기 분야에 집중했다. 1959년 스위스 제네바에 유럽 마케팅 본부를, 서독에 현지 생산 공장을 세웠다. 1980년대 이후로는 전자측정, 전자의료장비, 사무기기, 컴퓨터, 주변기기, 복합기, 복사기, 광학기기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며, 소프트웨어에서 하드웨어 부문에까지 영역을 넓혔다. 1999년 대형 IT 회사로는 처음으로 여성 CEO인 칼리 피오리나를 영입했다. 당시 미국 포춘이 선정한 ‘글로벌 500대 기업’중 여성 CEO가 재직 중인 곳은 장난감 제조업체 마텔과 금융기관 골든웨스트파이낸스 두 곳뿐이었다. HP는 2002년 컴팩과 합병하며 세계 최대 PC 회사로 등극했다. 글로벌 IT 공룡으로 거듭난 이후 HP의 행보는 아쉬움을 준다. 2010년 웹OS와 웹OS 기반 스마트폰을 생산하는 ‘팜’을 12억 달러에 인수했지만 사업 부진으로 중단을 선언했다. 2011년에는 PC 사업 철수 의향을 밝혔다. 하지만 이후 이를 다시 번복하더니 결국 창립 76년만에 기업 사업과 PC·프린터 사업을 분리하는 중대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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