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중화(中華)사상의 실체

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10여 년 전 중국기업의 초청으로 신장위구르성의 우루무치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때 “미국 대통령이 묵은 방의 바로 아래층에 숙소를 마련했다”는 말을 듣고, ‘미국대통령이 왜 이런 오지를 방문했을까?’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시내를 돌아다니며 기존관념과 판이한 중국의 모습을 보고서야 우루무치는 변방의 오지가 아니라 국제교역의 중심도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후 윈난성이나 쓰촨성, 광저우에 갔을 때도 제각기 독특한 문화를 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중국은 단일국가가 아니라 50개가 넘는 문화와 역사 및 인종을 가진 다민족, 다문화국가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역사를 보면, 최초로 제국을 이룬 진은 서쪽 변방의 오랑캐였고, 수와 당의 왕실은 북방의 선비족이었으며, 원은 몽골족, 청은 여진족이었다. 그런데다 송왕조는 남방 또는 이란계 혈통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를 제쳐두더라도 중국역사에서 이민족의 통치 기간은 한족의 통치 기간보다 훨씬 길었다. 그러면 한(漢)족은 어떤 민족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체성을 규명하기 어렵다. 영토의 3분의1이 넘는 티벳, 신장위구르, 내몽고의 원주민은 확실히 한족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나머지 영토의 주민들도 동서남북으로 기후나 지형은 물론 문화와 풍습이 제각각 달랐다. 인종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한자를 쓰는 사람을 한족이라고 하는가? 아닌 것 같다. 한자는 한국을 비롯한 베트남이나 일본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같은 말을 쓰는 민족이 한족인가?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중국이 전국적으로 말을 통일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 중화민국의 탄생 이후이고, 그 전에는 지방마다 한자를 읽는 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도 만다린어, 광동어, 대만어, 홍콩어 등으로 서로 다르다. 그래서 한족의 개념은 참 알기 어렵다.


중화사상이란 말은 더더욱 그렇다. 중국이라는 명칭은 신해혁명(1911년) 때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뒤부터 사용됐다. 그 전에는 송국, 원국, 명국, 청국이라 불렀다. 그렇다면 중화사상이라는 말은 20세기 이후 탄생한 게 틀림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중화사상이란 말에 마치 오랜 역사가 깃든 것처럼 오인하고 있을까?

그리고 중화사상이란 과연 중국인의 자존심을 이르는 말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도 아니다. 돌이켜보면, 중국은 이민족이 통치할 때 개방과 포용으로 세계만방에 국력을 과시하지만, 한족중심주의를 내세울 때 잦은 외침으로 국력이 쇠약하다 예외 없이 이민족의 통치를 불렀다. 이를 보면, 중화사상이란 중화민족의 자부심이라기보다는 오랜 이민족의 지배에 대한 반발심과 굴욕감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역사는 한족과 이민족의 권력투쟁이 반복적으로 전개된다. 그렇지만 우리 역사는 단 한번 통치권을 이민족에게 빼앗겼다. 자유분방한 고려는 로마교황과 사절을 교환할 정도로 세계적인 선진문화를 이루지만 폭압적 통제체제의 조선에게 망한 뒤 은둔의 나라가 됐다가 딱 한번 이민족통치를 겪는다. 그것도 30여년의 짧은 기간이니 반만년 역사에 비하면 그야말로 순간에 불과하다.

이런 역사를 안다면, 우리는 중화사상을 의식할 필요가 없고, 덩치에 기죽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오히려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냉정히 보면, 지금의 중국은 다민족, 다문화국가임에도 공산주의와 중화사상이라는 단순한 이념으로 통치하다보니 이념과 현실의 괴리로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나라다. 그러나 어쩌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이웃인데.

중국은 우리의 영원한 이웃이기에 우리는 중국의 고민을 알고, 이따금 쓴소리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중국의 일부라는 대만이나 홍콩, 티벳, 신장위구르, 내몽골 주민들과의 교류에 좀 더 흥미를 갖고, 인권이나 환경문제에도 관심을 써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진정한 이웃은 중국의 인민들이지 권부가 아니다. 따라서 지나치게 중국정부의 입만 바라볼 필요도 없다. 그래서 당당한 이웃이 되기 위해 우리의 인식부터 새로이 하자./문성근 법무법인 길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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