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꽃’은 장혁이 지난 2002년 SBS ‘대망’ 이후 15년 만에 출연한 주말극이다. 그때와 지금은 주말극에 대한 인식도, 제작환경도 많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장혁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돈꽃’ 대본이 가진 힘과 믿고 함께한 연출에 쌓아온 연기력을 폭발시키며 오히려 평일 미니시리즈를 뛰어넘는 작품성과 화제성을 이끌어냈다.
/사진=싸이더스HQ
최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카페에서 장혁과 만나 MBC 주말드라마 ‘돈꽃’(극본 이명희, 연출 김희원) 종영 인터뷰를 가졌다. 장혁은 ‘돈꽃’ 배우 및 제작진들과 제주도로 포상휴가를 다녀온 바로 다음날부터 인터뷰 일정을 소화했음에도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입소문도 나고 시청률도 늘어나니 즐거움 속에서 작품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물론 보는 사람이 많아지니 훨씬 더 긴장감은 있었다. 작품에 긴장감과 밀도감이 있어서 마무리가 잘된 것 같다.”
‘돈꽃’은 돈을 지배하고 있다는 착각에 살지만 실은 돈에 먹혀버린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장혁은 극 중 청아그룹 법무팀 상무 강필주 역을 맡았다. 창업자인 장국환(이순재 분)의 손자 장은천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청아그룹의 키맨이 됐다. 그가 자신의 부모와 동생을 죽인 이들에게 복수하고 청아그룹을 손 안에 넣으려고 하는 내용이 주된 줄거리다.
장혁이 ‘돈꽃’을 기분 좋게 끝낼 수 있는 이유는 시청률과 화제성에서 꾸준한 성장세를 보였기 때문. 첫 회에서는 10.3%(닐슨코리아 전국기준)을 기록,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마지막 회에서 23.9%를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빠른 전개에 세련된 연출력, 배우들의 몰입도 높은 연기력이 이룬 성과였다. 물론 좋은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다.
“출연을 세 번을 고사했다. 감독님도 정해져있지 않고 편성이 어떤지도 몰랐을 때였다. 세 장면 정도를 미리 받았는데 강필주는 뜨거움과 야비함을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과연 가능할까 싶어서 거절했다.”
그러나 계속된 제안에 결국 마음의 문을 열었다. 장혁은 출연을 결정하며 앞서 자신과 ‘운명처럼 널 사랑해’와 단막극(‘2014 드라마 페스티벌-오래된 안녕’)을 함께 한 김희원 감독을 B팀 연출로 넣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김희원 PD가 메인 연출을 맡게 됐고, ‘돈꽃’은 그의 입봉작이 됐다. 장혁은 “감독님이 저에게 개런티를 주시기로 했다. 다음 작품에서 정말 매력 있는 캐릭터를 주겠다고 하셨다. 이 분을 특히 강조해 달라(웃음)”며 너스레를 떨었다.
“김희원 감독님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드라마를 잘 그린다는 것이다. 스케일을 크게 하는 것보다도 사람이 가진 감정의 간극을 잘 끌어내는 분이다. ‘위기의 주부들’을 찍는 것처럼 복수를 해야 하는 관계임에도 당장 복수할 수 없는 애증의 관계를 잘 묘사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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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즐겁게 망하자고 이야기했다. 감독님께도 입봉작 아니냐며 어차피 망할 거라고 얘기했다. 주변 지인들도 주말극을 한다고 하니까 10명 중 9명은 왜 주말극을 하냐고 하고 1명은 애써 괜찮다고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제가 마지막으로 주말극에 출연했을 때만 해도 주말극과 미니시리즈의 차이가 없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니 제작비 차이도 많이 나고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있더라.”어찌됐든 출연은 결정됐고, 이제 작품을 열심히 만드는 과정만이 남아있었다. 장혁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미니시리즈에서 망하든 주말극에서 망하든 어차피 망하면 0이다”라고. 이어 “주말극이 잘된다면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듣는 것 외에도 주말극이라는 브랜드를 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않나”라며 호탕한 포부로 임했음을 밝혔다.
“촬영하는 와중에 2회 연속 방송해야 한다고 하더라. 이게 뭐지 싶었다. 악재일지 호재일지 모르지 않나. 우선 토요일과 일요일 중에는 토요일로 가자는 이야기했다. 홍보 영상을 찍을 때도 주말극 같지 않다는 소리가 나왔다. 일단 내보내고 이상하면 주말처럼 찍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다. 막상 내보내니까 반응이 좋은 거다. 미드처럼 찍고 싶었다. 드라마가 흘러가다가 엔딩크레딧이 갑자기 딱 나오니까 신기했다. 그런 것들이 좋게 작용된 거다.”
장혁이 분석한 ‘돈꽃’의 흥행요인이다. 120분 연속 방송은 결과적으로 ‘돈꽃’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다만 120분 연속방송 자체가 엄청난 메리트가 있던 것은 아니다. 워낙 작품의 몰입도가 높아 시청자들의 시선을 120분 이상 붙잡아둘 수 있었던 것이 성공요인이다. 내용적으로도 ‘돈꽃’은 주말극의 한계를 뛰어 넘은 지점이 있었다.
“캐릭터가 사건에 파묻혀서 가는 게 아니라 사건을 끌고 갔다. 사실 사건은 장은천의 복수극으로 단순하다. 내용만 보면 3부 만에 복수가 가능하다. 비리를 다 알고 있으니 던지기만 하면 되지 않나. 그런데 복수를 하는 순간 상실감만 남는다. ‘햄릿’과 비슷한 유형이다. 그래서 이 인물은 기다린 거다. 정말 행복한 순간까지 기다리면서 여유를 가졌다. 여기서 또 모순이 생긴다. 여유를 갖고 있으면서도 들키면 끝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긴장감은 계속 있었다.”
출생의 비밀, 불륜, 복수 등 막장드라마에 등장하는 소재는 모조리 들어간 ‘돈꽃’이다. 그럼에도 ‘명품 막장’ 혹은 ‘막장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들은 이유가 있다. 인물들의 감정선을 매우 세밀하게 표현한 덕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구태의연한 연출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장혁의 해석이다.
“대부분이 바스트 샷이었다. 심리적인 것을 조명하다보니 다행히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건의 템포는 느리지만 압축적인 것을 잘 살렸다. 결혼을 하더라도 결혼 행진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차피 뻔한 거니까. 안 보여주더라도 정보만 주면 된다. ‘돈꽃’은 그렇게 함축적인 방식을 잘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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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과정을 통해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자연히 마지막 회에 대한 관심은 최고조로 높아졌다. 강필주의 복수가 성공할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된 상황, 강필주는 결국 청아그룹의 경영진들을 감옥에 보냈다. 그러나 본인 또한 징역을 살았다. 나온 후에는 또 다른 혼외자에게 칼을 맞았으며, 다시 회사로 돌아올 여지를 주기도 했다. 이에 장혁은 “해피나 새드라기보다는 현실적인 엔딩”이라고 평했다.“강한 놈이 이기는 거지 윈윈하는 느낌은 아니다. 강필주를 버리고 장은천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약육강식을 아는 놈이다. 애매한 사람이 기업의 오너가 돼서 망가지고 있으니 다시 만들려고 온 거다. 구원투수이지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 속에서 걸어가지 않나. 앞으로의 행보를 보여주는 거다. 그래서 현실적이라는 느낌이 들더라. 만약 강필주가 죽으면서 끝났다면 드라마적 느낌이 강했을 텐데 그보다 현실적이었다. 묘했다.”
장혁은 그에게 대상을 안긴 ‘추노’ 대길이 이후 ‘인생작’ ‘인생캐’를 만났다는 평을 들었다. 지난해 MBC 연기대상에서는 ‘돈꽃’으로 주말극 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기도. 이에 장혁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너무나 좋다”며 “물론 배우 혼자만의 힘은 아니다. 저는 총알이라고 생각한다. 쏘는 사람도 잘 쏴야 되고 좋은 총으로 과녁도 잘 조준해야 한다. 5점을 맞춰서 이슈가 된다고 해도 10점에는 밀리는 거다”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모든 배우들이 많은 작품을 해도 저마다 대표작이 있다. 저도 마찬가지다. 칭찬을 받아도 멈춰있지 않고 계속 나아가야 20년을 넘어 30년을 갈 수 있는 거다. 제 길을 가다가 또 작품을 잘 만나서 화제성이 생기면 이런 수식어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어 자신의 연기 목표가 그럴싸한 상을 받는 것에 멈추는 것은 아니라며 소신을 드러냈다. “세어보려고 한 것은 아닌데 받은 상 중에 최우수상 빈도가 가장 많다”며 “대상을 받으면 다음 년도가 불편한데 최우수상을 받으면 편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영화 ‘감기’ 촬영 당시 훈련 내용을 빗대어 표현했다.
“나무전봇대에 올라가서 공중그네를 잡는 훈련을 받았다. 만약 평지에서 잡으라고 하면 쉽게 잡을 수 있을 텐데 15m 위에서는 쉽게 뛰지 못하겠더라. 사람들의 잣대와 같다. 어쨌든 뛰어야 하는 것은 같은데 처한 상황이 달라진 거다. 대상을 받든 뭘 받든 내가 가고자 하는 것은 더 깊다. 대상은 1년의 칭찬이다. 그런데 1년을 하자고 배우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흔들릴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앞으로도 노력할 거다.”
/양지연기자 sesta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