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살촉과 검, 온갖 날카로운 것들이 리차드 3세를 향한다. 세 치 혀와 간악한 재주로 혈육을 죽이고 끝내 왕좌에 오른 리차드 3세. 그의 적 리치먼드 백작의 칼끝이 살을 파고들자 그는 땅 밑으로 꺼지기 시작한다. “내가 지은 죄를 묻는 그대들의 죄를 묻고자 한다”고 읊조렸던 그는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듯 자취를 감췄다. 그의 손에 죽은 이들, 그의 욕망을 잠재운 이들이 꺼진 땅을 경계로 서 리차드 3세를 내려다 본다.
실존 인물인 리차드 3세는 15세기 영국 요크 왕가의 마지막 왕으로 셰익스피어는 장미전쟁의 최후 승자가 된 튜더왕조의 정당성을 위해 리차드 3세를 왕위를 거머쥐기 위해 친족 살인도 서슴지 않는 추악하고 잔인한 희대의 폭군으로 조각해냈다. 원작을 충실하게 따른 이번 작품은 꼽추에 온몸이 비틀어진 신체적 결함에도 권모술수와 화려한 언변, 리더십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왕위에 오른 리차드 3세가 끝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을 차분히 그리면서도 동질감과 연민을 거두지 않았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또 한 가지는 무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꾸며진 무대는 대관식 장면, 리차드 3세가 리치먼드 백작의 칼끝에 죽음을 맞는 장면 등에서 순식간에 모양을 바꾸며 또 하나의 시적 언어를 완성한다. 특히 장막이 걷히고 드러나는 28m 깊이의 무대의 미장센은 연극 무대 활용의 새로운 전범이 될만하다.
수십 명의 인물이 등장해 갈등구조가 얽히고설키는 원작 리차드 3세는 연극으로 감상하기 쉬운 작품이 아니다. 이를 감안해 한아름 작가와 서재형 연출은 동시대를 다룬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섭렵하며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축하는 한편 불필요한 인물이나 스토리를 과감하게 생략하고 다듬어 관람 문턱을 낮췄다. 올 한 해 독일과 프랑스의 유명 연출가들이 선보이는 연극 ‘리차드 3세’의 무대가 두 번 더 예정돼 있는 가운데 이번 작품은 충실한 인물 해석과 세련된 연출 기법의 힘을 보여주며 첫 포문을 성공적으로 열었다. 내달 4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사진제공=샘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