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왼쪽)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주지사 및 시장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조5,000억달러 규모의 인프라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중국·일본·한국 등 많은 나라에 어마어마한 돈을 잃었다”며 “호혜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워싱턴DC=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중국뿐 아니라 한국·일본 등 동맹국들까지를 상대로 ‘호혜세(reciprocal tax)’를 무기로 삼는 무역보복을 시사하면서 트럼프발 무역전쟁의 전운이 동북아 전역에 짙게 드리웠다. 하지만 통상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러한 호혜세는 존재하지 않고 부과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호혜세는 ‘보복용 수입 관세’를 일반화한 표현으로 최종 결단만 남은 외국산 철강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등 고율 관세 부과를 지칭한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트럼프 정부가 한중일과 유럽연합(EU) 등의 반발이 거셀 수입 철강에 대한 제재를 앞두고 무역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호혜세를 또다시 거론했다는 분석이다. 다만 호혜세가 WTO 중심의 다자무역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조치인 만큼 이를 계기로 미국이 반덤핑·상계관세 등 무역구제 조치가 더욱 강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 경우 우리 주력제품인 철강 등은 또 고율 관세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높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폭스비즈니스네트워크와의 인터뷰에서 “10~20%의 국경세를 부과하려 하자 모두가 미쳤다고 했지만 호혜세를 언급했을 때는 누구도 화를 낼 수 없을 것”이라며 국경세를 대체하기 위해 호혜세 카드를 꺼내 들 수 있다고 시사한 바 있다. 지난해 5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호혜세에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며 “특정 국가가 우리에게 52%의 세금을 매기는데 우리는 같은 제품에 아무런 세금도 매기지 않는다면 아무도 이를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대로 호혜세를 부과하려면 미국은 수만개 상품의 관세를 국가별로 달리하고 이를 법률로 정해야 한다. 입법도 어렵지만 실제 산업현장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고 일부 상품만 선별해 실시하면 미측이 중시하는 농산물 등의 해외 관세가 오르며 부메랑이 된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기본인 관세 등에 관한 최혜국대우(MFN)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호혜세 도입 주장에 대해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특정 국가가 호혜세를 부과한 사례는 없었다”며 “WTO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미 정부 고위당국자도 이날 블룸버그에 “호혜세와 관련해 아직 구체적인 방안을 갖고 있는 건 없다”면서 “대통령이 그동안 다른 국가들에 당한 걸 되돌려준다는 말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상무부가 보고한 중국 등 외국산 수입 철강의 안보 침해 여부 조사 결과에 따라 최종 제재 여부 및 조치를 발표하기에 앞서 호혜세를 내세워 미측의 피해를 부각시켰다는 분석이 많다. 미 철강 업계 최고경영자(CEO)들은 이달 초 백악관에 서한을 보내 “외국산 철강 수입을 제한해달라”고 거듭 촉구한 바 있다.
철강뿐 아니라 알루미늄과 지적재산권까지 트럼프 정부의 제재 대상에 올라 있는 중국 측도 백악관의 호혜세 발언이 사실상 중국 등을 겨냥해 무역보복에 나서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으로 보고 있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을 호혜세의 타깃으로 특정하진 않았지만 미국은 중국을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협하는 국가로 지목해왔다”고 보도하고 제재조치가 내려지면 미중 간 무역전쟁이 격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은 지난달 자국 태양광 제품에 대한 미측의 세이프가드에 맞서 미국산 수수에 대해 반덤핑 조사에 나선 바 있으며 이 밖에 미국산 육류 위생 기준 재검토, 자동차 수입제한, 미 국채 매각 등이 대응수단으로 거론되고 있다.
/뉴욕=손철 특파원 변재현기자 humblenes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