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불리한 가용정보(AFA)’ 조사기법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이번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는 ‘맞불’의 성격에 가깝다. 특히 지난달 미국이 세탁기와 태양광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발동한 후 한 달 새 양국이 주고받는 공세가 숨 가쁘게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뽑아든 ‘호혜세(reciprocal tax)’를 포함해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한 철강 안보영향보고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3차 협상, 제10차 한미 방위비분담협상, 4월 환율보고서까지 미국이 보호무역 공세의 고삐를 당길 이벤트가 줄줄이 이어지는 만큼 양국 간 분쟁의 골이 깊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3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여야 상하원의원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미국 노동자를 위한 공적 무역을 주제로 연 간담회에서 “한국과의 협정은 재앙이었다. 우리에게 그 협정은 손실만 낳았다”고 말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4일 수입 세탁기 등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조치에 서명하면서 한미 FTA를 “재앙으로 판명된 거래”로 규정하는 등 한미FTA를 여러 번 ‘재앙’으로 표현한 바 있다.
한미 양국의 통상 분쟁에 불이 붙은 것은 지난달 23일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16년 만에 발동시킨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의 칼날이 최우방인 우리나라를 직접 겨냥한 것. 한국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제외해달라는 우리 정부의 간곡한 요청은 묵살됐다. 이에 우리 정부도 곧바로 보복관세를 포함한 WTO 제소 방침을 밝혔다.
이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2차 협상을 조용히 치르는가 싶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다시 한·중·일을 표적으로 ‘호혜세(reciprocal tax)’를 부과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도 지난 12일(현지시간) 한국 등 3개국에서 수입한 철강 후판에 대한 일몰재심에서 반덤핑·상계 관세를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덤핑·상계관세가 부과되지 않는 몇 안 되는 철강재인 대형 구경 강관에 대해서도 반덤핑·상계 관세 조사에 착수한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지금껏 정무적 판단 등으로 미뤄온 AFA 조항에 대한 WTO 제소 카드를 뽑아든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은 2016년 5월부터 8차례에 걸쳐 한국산 철강재와 변압기에 대해 9.49~60.81%의 고율의 반덤핑·상계관세를 부과해왔지만 지금껏 WTO 제소는 미뤄왔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꺼번에 소송이 서네개씩 진행되는 경우가 상당히 드문 것을 감안하면 미국과 통상 분쟁을 개별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정부 방침이 WTO 등 다주주의 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강경한 방식으로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우리 조치에 미국이 다시 강으로 맞부딪혀올 경우 문제가 커질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무더기’ WTO 제소는 기업이 입은 실제 피해를 온전히 복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미국의 보호무역 공세의 수위를 낮추는 데는 일정 부분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WTO에서 승소해도 미국이 고칠 것 같진 않지만 한꺼번에 하는 것은 협상 지렛대 차원에서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며 “다만 호혜세와 같이 기상천외한 수단으로 미국이 계속 어젠다를 선점해가는 데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세종=김상훈기자 ksh25t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