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WTO 제소했다면 결과 달라졌을 것"...禍 자초한 정부

[철강 참사 부른 잃어버린 2년]
2016년 포스코 열연강판 반덤핑 판정이 참사의 시작
정부 제소 실무준비 끝내놓고도 무역보복 우려해 중단
탄핵정국으로 정부 기능 사실상 마비...최종결정 미뤄져
새 정부 협상 강조하다 뒷북 제소 '소잃고 외양간 고칠판'

“이제 와 허겁지겁 나서곤 있지만 불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졌습니다. 한국 철강 업계가 송두리째 타버린 뒤에야 불을 끄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정부가 미국이 반덤핑 조사에서 고율의 관세를 부과할 때 사용하는 조항인 ‘불리한 가용정보(AFA)’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한 지난 14일. 정부의 제소 소식을 전해 들은 국내 철강 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지난 2년 동안 브레이크 없이 달려온 미국의 통상제재를 이제 와서 세우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의미였다. 그는 “미국이 2년 전 AFA를 꺼내 들고 한국 철강재를 건드리기 시작할 때부터 대형 악재 징후는 감지됐다”며 “아마 미국은 또 다른 고강도 제재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그로부터 사흘 뒤 미국 상무부는 한국산 철강재를 ‘융단폭격’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은 무역확장법 232조를 공개했다.

철강 업계 전문가들은 무역확장법 232조 발동이 예고된 재앙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악재 징후가 감지된 것은 2016년 포스코 열연강판에 대한 반덤핑 판정 때부터였다. 미국은 뚜렷한 명분이 없었지만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고자 AFA를 꺼내 들었다. AFA는 미 정부가 요구하는 자료를 최선을 다해 제출하지 않을 경우 정부 보조금을 받은 기업에나 매길 수 있던 상계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할 수 있게 한 조치다. 미 상무부는 포스코가 조사 과정에서 불성실했다는 이유를 들어 AFA를 적용, 포스코 제품이 보조금을 받았다고 딱지를 붙이는 데 ‘성공’했다.

포스코산 열연강판은 참사의 시작일 뿐이었다. 미국은 곧바로 다른 한국산 철강재로 타깃을 돌렸다. 보조금을 받은 포스코 철강재를 사용한 다른 제품도 문제가 된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실제 포스코 열연을 사용한 넥스틸의 유정용 강관 반덤핑 예비판정에서는 2016년 8.04%였던 관세를 46.37%로 대폭 상향했다. 현대제철이 만드는 송유관에도 같은 이유로 예비관세를 세 배나 높였다.


무역확장법 232조라는 초고강도 무역제재 발동 명분은 그렇게 완성됐다. 미국은 무역확장법 232조 카드를 꺼내면서 보조금을 받은 철강재가 밀려 들어오고 있어 자국 철강 산업이 고사위기에 처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보조금을 받았다고 판명된 해외 철강재를 일괄적으로 나열해 공개했다. 상무부가 내놓은 ‘불량 철강 리스트’에는 한국(포스코)산 열연강판 등이 또렷하게 명시돼 있다.

정부가 부랴부랴 초기 발화지점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시기를 놓쳤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이 2016년 처음으로 포스코 등 국내 철강 업계를 향해 AFA 조항을 꺼내 들 당시 이를 막아야 한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제기된 터였다. 특히 WTO 같은 국제기구에 제소해 부조리함을 당당히 못 박아둬야 후폭풍을 막을 수 있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는 당시 이미 제소를 위한 실무적인 준비를 다 끝내놓고도 전방위적 무역보복을 우려해 실행 직전에 중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설상가상으로 곧이어 시작된 탄핵 정국으로 사실상 정부 기능이 마비되면서 최종 결정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당시 정부의 제소 준비에 동참했던 통상 업계 전문가는 “제소 이후 어떤 역풍이 불지 모르는 상황이라 실무진에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는데 결단력 있게 밀어붙일 컨트롤타워마저 사라진 상태였다”고 토로했다.

미국발 통상압력은 점차 거세졌지만 정부는 여전히 제소에 소극적이었다. 무역확장법 232조 발동을 위한 조사를 진행하던 지난해 9월 한국이 중국과 함께 전면 관세 대상(그룹2)에 포함됐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정부는 “협상으로 풀 수 있는 것은 협상으로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며 여전히 신중한 입장을 고수했다. 지난해 12월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 발동으로 기울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도 강성천 산업통상자원부 통상차관보를 현지로 파견해 담판을 벌이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이달 14일 한국에 초고강도 관세를 매기는 방안을 포함한 232조가 공개된 뒤 정부의 미흡한 대응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비등하자 그제서야 강경 대응 입장으로 돌아서는 모양새다. 강 차관보는 19일 “최종 결과에 따라 WTO 제소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선회할 뜻을 밝혔다.

이미 포스코산 열연강판에 떨어진 불똥이 한국산 철강재 전반으로 번지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라는 비난이 높다. 2년 전 미국이 AFA 카드를 만지작거릴 때 과감하게 나섰다면 이 같은 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특히 WTO에 제소하더라도 판결이 나기까지는 2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업계 관계자는 “2년 전에 제소했다면 232조 발동 즈음에 맞대응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보조금을 받은 외국제 철강이 밀려온다는 미국의 논리를 깨부술 수 있는 카드를 묵혀둔 셈”이라고 말했다.

/김우보·구경우기자 ub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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