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언론인 고미요지, 北 김정은을 말하다]<13>김정은의 어린시절…지기 싫어하는 성격

김정일 관저·별장서 보낸 유년기...전속 가정교사에게 배우다
15세 때 북한의 물자부족과 중국의 개혁개방을 얘기한 김정은
스위스 유학을 거쳐 북한에서 대학을...일찌감치 후계자 내정
어릴때부터 농구에 푹 빠져...이겨야만 직성이 풀렸던 김정은

김정은은 유소년 때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농구에 푹 빠져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형 정철(그래픽 왼쪽사진)과 팀을 나눠 경기를 했는데, 농구에서도 지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는 증언이 있다. 그는 마이클 조던과 코비 브라이언트 같은 미국 프로농구선수들의 열성팬이기도 했다. /자료사진=서울경제DB
◇ 어릴 때부터 간단한 일본어 구사

김정은은 유소년 시기를 거의 특각(김정일의 별장)과 김정일의 관저에서 지냈다. 다음은 그의 생활을 7세 때부터 보아왔던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 “왕자들(정철·정은)은 소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관저 내 전속 가정교사로부터 배웠고 그들에게는 학교친구가 없었다. 두 왕자는 늘 함께 놀았고 이모님이라 부르던 고용희 여동생의 아들이 합세하는 경우가 많았다.”

후지모토에 따르면 왕자들은 어릴 때부터 한자를 누군가에게 배웠다. “오하이요, 곤니치와, 곤방와” 등 간단한 일본어 인사도 이미 알고 있었다. 두 왕자의 어머니 고용희는 재일조선인으로 북한에 건너온 귀국자다. 그러나 그녀는 내 앞에서도 일본어는 전혀 쓰지 않고 귀국자임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아들들에게 일부러 일본어를 가르쳤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이런 연유로 김정은에 대해 ‘백두산의 혈통’이 아니라 ‘후지산의 혈통’이라는 야유도 있다.

◇ 일찍부터 강화된 사회적 관심

사회적 관심은 형 정철보다 동생 정은이 더 강했다. 1998년 6월 26일 고용희의 생일날 15세 정은이 내뱉는 말에 후지모토가 놀랐다. “후지모토, 외국 백화점과 상점에는 물자와 식량이 넘치도록 진열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상점은 어떻게 된 건가요?” 정은은 이미 일본을 여행한 것 같았고 스위스를 시작으로 유럽에도 가족여행과 유학 때 목격한 해외의 풍요로움에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장군 가족이 북한 국내 물자부족에 대해 직접 볼 기회는 거의 없지만, 관저에서 TV 시청이 가능했다. 해외뉴스로 전해진 북한의 상황, 은폐된 내부영상 등도 봤을 가능성이 있어 자국의 물자부족을 감지한 듯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 10대 후반의 아이가 자국과 외국을 비교했다는 것에 후지모토는 놀랐다. 후지모토가 정철과는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

게다가 정은은 이웃나라 중국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후지모토, 위에서 들은 이야기지만 이제 중국은 여러 면에서 성공했다고 해요. 공업·상업·호텔·농업 등 모두가 잘되고 있다죠?”

정은이 ‘위’라고 한 것은 김정일을 가리킨다. 정은은 계속해서 궁금증을 털어놓았다. “우리나라의 인구는 2천3백만 명인데 중국은 13억 명으로 통제 가능하다니 굉장해요. 전력보급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농업도 큰일이에요.” 그는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의 성공을 김정일에게 들어서 관심이 많았다. 정은이 북한의 현실과 장래의 불안에 대해 신중하게 계속 얘기한 것이 후지모토의 인상에 남아있다.

◇ 스위스 신문이 전한 김정은의 유학시절

김정은이 북한 소학교에 다녔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는데 정은이 스위스에 유학했기 때문. 수도 베른 국립중학교에 박운이라는 이름으로 1996년 여름부터 2001년 1월까지 다녔다.

스위스에서도 북한 왕자의 생활상이 큰 관심을 끈 것 같다. 2012년 4월 1일과 22일자 프랑스어 일요신문 르마탱 디망슈는 정은의 유학시절 성적이 시원찮았고 수업에 빠지기 일쑤였다는 급우들의 증언을 전했다. 북한 대사관이 구입한, 학교에서 350m 정도 떨어진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결석일수는 1년차 75일, 2년차가 105일에 달한다.


농구를 아주 좋아해서 미 NBA선수 마이클 조던의 배번호 23번 유니폼을 애용했다. 스위스에 머물 때 그곳 주재 북한대사가 부친을 대신해서 정은의 신변관리를 했고 평양에서 보낸 잘 교육받은 아이들과 어울리도록 조치됐다.

스위스 유학시절 정은·여정 남매를 돌봐준 외숙모 고영숙과 남편 이강은 “유년기 김정은은 운동을 열심히 했고 여정은 사람들과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말한다.

◇ 귀국 후 사실상 후계자 내정설

다른 두 명의 형제와 비교해 성격적으로 강해 일찍부터 후계자로 내정됐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학업 성적에 대해 한 친구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성적은 그러그러했다. 가도 없고 불가도 없었다. 스포츠를 좋아했는데 특히 농구에 아주 능했다”고 말한다.

또 다른 친구는 “그가 혼자 자전거를 타고 온 적이 많았다”며 자기 집에서는 엄마가 만든 간식을 먹고 함께 숙제를 하고 놀았다. 휴일엔 둘이서 사이클로 외출하기도 했는데 호위는 없었고 늘 음악을 입으로 흥얼거렸다고 했다. 모국으로 돌아간 뒤에 최고학부 김일성종합대학과 엘리트 군인을 길러내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 다녔지만 농구 등 스포츠와 TV게임에 빠져 지내곤 했다.

◇ 스위스 유학 전부터 농구에 푹 빠진 김정은

정은이 스위스로 유학하기 직전 1996년 1월부터 농구를 시작했다. 초대소의 직원, 기쁨조(장군과 간부들 앞에서 춤과 예능을 하는 남녀), 경비담당 군인 등이 팀을 나눠 초대소 체육관 등에서 경기를 했다.

정철도 정은도 곧장 농구의 매력에 빠졌다. 정은은 밥 먹고 5분도 채 안돼 농구를 하러 가려 했다. 고용희가 “조금 더 앉아 있어라”며 야단을 쳤다. 정은·정철과 수행원들은 농구의 자세한 룰도 몰랐고 심판을 맡은 후지모토도 마찬가지였다. 후지모토는 김정일의 명령으로 일본에 식재료를 사러 가면 농구교본을 사올 생각을 했다.

두 왕자는 스위스 유학 중에도 축일, 특히 김정일의 생일(2월 16일)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4월 15일), 북한 건국기념일(9월 9일) 노동당창건일(10월 10일) 등 중요한 기념일이 있으면 꼭 귀국했다. 일단 귀국하면 2개월 가까이 머물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자주 농구를 했다.

후지모토 겐지에 따르면 김정은은 어릴 때부터 지는 것을 싫어했다. 형 정철과 여러 팀을 만들어 농구경기를 할 때도 팀원의 실패를 봐주지 않고 승리를 위해 혹독하게 훈련을 했다. 격려하는 리더십의 정철과 대조적이었다. 공놀이를 하며 화를 참지 못해 형의 얼굴에 공을 던진 적도 있다. /고계연기자 kogy21@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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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새해를 맞아 평창동계올림픽(2월9일 개막)을 앞두고 한반도 정세(외교 안보 등)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일촉즉발의 험악했던 형국을 떠올리면 상당히 이례적 진전이지만 美·日은 ‘비핵화’를 내세워 북한을 압박하는 터라 상황 전개는 여전히 유동적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북한의 김정은 당위원장과 주고받은 말폭탄과 위협은 당장 전쟁이라도 터질 것 같은 섬뜩한 벼랑 끝 대치, 그 자체였다. 북한의 잇단 탄도미사일 발사와 6차 핵실험, 그리고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가 어우러진 결과였다. 애꿎게도 우리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위기감에 시달려야 했다. 트럼프에 맞서는, 30대 초반의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은 도대체 어떤 인물인가. 미치광이인가? 전략가인가? 그의 성장 과정과 인성 등을 들여다보고 북한의 과거 현재 미래 전반을 분석·예측해보는 일본 언론인 고미요지(도쿄신문 편집위원)의 원고를 입수했다. 국내 판권을 가진 서교출판사(김정동 사장)의 양해로 콘텐츠의 일부를 고치고 줄여 정기적으로 옮겨 싣는다.

* 고미 요지(五味 洋治) :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주니치신문 서울지국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중국총국에서 근무하며 북한 뉴스를 쫓아왔다. 지난해 2월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과 7년 동안 주고받은 전자우편 대화록이 ‘안녕하세요, 김정남입니다’으로 2013년 번역서로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 도쿄신문 편집위원으로 재직 중. 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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