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50>이두식 '축제']강렬한 오방색의 변주...화폭위 신명나는 춤판

조화롭고 아름답게 어우러진
청적황백흑 다섯가지 원색
색조·필치서 기운·흥 일렁여
설계도 없이 직관 따라 작업
로마 지하철역 벽화 그리기도

이두식 ‘축제’ 캔버스에 유채, 73x61cm /사진제공=이두식 유족

아주 어릴 적, 꽹과리 소리 캉캉 울리던 농악대 풍물놀이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을 더듬어 본다. 너무나 강렬했고 조금 놀라기도 했던 것 같다. 당장 나가 어깨춤을 들썩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싫지도 않았다. 시원함과 통쾌함이 남았다. 유럽을 대표하는 축제 중 하나인 스위스 루체른의 카니발을 마주했을 때의 첫 느낌도 당혹스러움에 가까웠다.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이러나, 집단 광기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흥에 취한 사람들이 낯설었다. 더 놀라운 것은 마을 주민들뿐만 아니라 어색해하던 이방인까지 어느새 하나가 되어 즐기게 되더라는 사실이다.

여기 이 그림, 이두식(1947~2013)의 그림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이 꼭 왁자지껄한 풍물패와 카니발 행진에 휩쓸린 듯했다. 강렬한 색채 때문일까, 그린 건지 뿌린 건지 휘젓고 찍은 것인지 정의하기 어려운 그 형태 때문일까. 그림 앞에서 화들짝 놀랐던가 어안이 벙벙했던가 아무튼 그런 충격을 경험했다. ‘축제’이라는 제목을 보고는 또 한번 놀랐다. 우리네 농악놀이도, 서양의 카니발도 모두가 들썩이는 잔치이며 축제 아닌가. 작가 이두식은 그림 아래쪽에 영문으로 서명하고 작품명은 ‘Festival’이라 적었다. 우리말 제목으로는 ‘축제’ 외에도 ‘잔칫날’ 또는 ‘혼례’ 등으로 불렸다.

찌릿한 진동을 일으킨 이두식 그림의 진앙지는 색이다. 그는 한국의 전통색인 ‘오방색’을 택했다. 전통 가옥의 단청에서 보던 청적황백흑의 다섯 가지 원색이다. 자칫하면 촌스럽게 보일 수 있고, 그 색을 제압하기가 어려워 원색을 기피하는 작가들도 있다. 하지만 이두식은 한 화면에서 이 강렬한 색들의 조화를 이뤄냈다. 아름답다. 전혀 어색하지 않은 어우러짐에서 오방색이 오륜기를 떠올리게 한다. 오륜기는 파랑·노랑·검정·초록·빨강의 다섯 색이다. 세계 5대륙의 개성 뚜렷한 선수들이 정체성 분명한 국가적 배경을 갖고서도 올림픽이라는 축제 한마당에서 실력을 겨루고 있다. 흥겨운 긴장감과 강인한 의지가 공존하는 가운데 그 안에 인류가 추구하는 근원적 가치가 스며있다. 올림픽도, 이두식의 그림에도.
이두식 ‘환희’ 1988년작, 캔버스에 유채, 227x660cm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한 번 보면 잊히기 어려운 이두식의 그림은 보다시피 기(氣)와 흥(興)이 흐른다. 특히 붉은 색조가 강한 그의 그림이 재물운을 불러온다는 풍문이 인사동 화랑가에 돌았다. 워커힐호텔을 비롯해 힐튼, 메리어트, 롯데호텔 등에서 커다란 ‘축제’ 그림이 투숙객을 맞는 이유다. 대형빌딩의 정문과 로비에서도 수문장처럼 만날 수 있는 그림이었다. 그의 ‘축제’를 보고서 우울증을 극복했다는 컬렉터의 일화도 전한다. 들여다보면 빨간색은 불붙은 듯 붉고, 초록색도 뒤적이면 벌레와 새가 숨어있을 것만 같은 꿈틀거리는 녹색이다. 파란색은 물속부터 하늘 너머까지 꿰뚫는 깊이감이 있고, 백색은 색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빛이 합쳐진 듯한 밝음이다.

“유럽 궁중의상이 의상예술의 극치라고 하면 색채는 우리 것이 정말 극치다. 궁중의상은 어느 나라나 화려한데, 우리는 오히려 원색과 중간색 톤을 사용해 조화를 잘 이뤘다. 여유와 근엄함이 서로 어울린다. 2차 대전 이후 일어난 프랑스의 앵포르멜 운동의 영향으로 검은색이 많고 형태도 없는 추상화가 유행했다. 우리는 당시 6·25전쟁으로 상처가 깊었던 때라 관혼상제 때 만나는 화려한 원색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거꾸로 거기서 밝은 면을 보고 1988년 처음 발표한 표현주의적 추상화에 원색을 과감하게 썼다. 색이 튀어나오듯이 보이는 나의 그림을 보고 관객들은 우리 민족의 근원적 정서를 공감해 줬다. 오방색과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삶의 환희와 밝은 면을 표현했다. 여러 색채를 감지할 수 있는 사회는 그만큼 구성원들도 건강하고 밝은 것이다.” (이두식 저서 ‘고릴라 로마역에 서다’ 중에서)
이두식 ‘생’, 캔버스에 유채, 161x131cm /사진제공=이두식 유족

원래 이두식의 가문은 무관 집안이었으나 일제를 거치며 가세는 기울었고 텅스텐 광산 개발에 뛰어든 할아버지 덕에 경상도 풍기 쪽에 안정적 터전을 잡았다. 지금의 경북 영주다. 이두식의 아버지는 미술에 대한 꿈을 품어오다 일본에서 사진기술을 익혀 사진관을 운영했다. 어머니가 마흔 넘어 낳은 늦둥이 막내는 아버지의 원판 수정작업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명암이 어떻게 형태를 바꿔놓는지, 색의 미묘한 변화를 체험했다. 시골 동네에서 미술학원을 보내주진 못했지만 아버지는 매년 가을 서울에서 열리는 국전(國展)을 보러 나설 때면 꼭 막내를 불러 데리고 다녔다.


타고난 손재주가 워낙 좋았으니 그림 공부를 따로 한 적 없음에도 당시 최고였던 서울예고에 입학했다. 그때 처음 만난 첫사랑 소녀 손혜경(1947~2002)과 결혼까지 했으니 행복한 사내였다. 스물여섯에 결혼해 가난한 신혼을 보낸 일화는 꽤 유명하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달아 여의던 그 해 돌도 안된 큰아들 하린이 급성 폐렴에 걸렸다.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 했던 그가 수출용 상업그림을 그려달라는 선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화가의 자존심을 내려놓았다. ‘이발소 그림’을 그린 것이다. 꼬박 5년을 매일 출근해 온종일 그림만 그려 나중에 난시가 됐지만 그 덕에 아들 둘을 키워냈다. 이두식은 부끄러울 수 있는 ‘이발소 화가’ 시절을 얘기하면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화가의 경험은 작품세계에서 빛을 발한다. 그림은 공상 과학이 아니다”면서 툭툭 털곤 했다.

이두식은 대학 졸업 무렵인 1968년에 신상회전(新象會展)의 최고상 수상으로 본격 화단에 데뷔했다. 신상회는 당시 재야작가 중심의 단체로서 나름 참신한 신인 발굴에 주력하고 있었다. 전후 세대의 비극적 분위기 와중에 이두식은 칙칙하고 무겁지도 우울하거나 괴롭지도 않았다. 그가 시대를 앞서 갔다고 할 수만은 없으나 결코 뒤지지는 않았으며 의식적으로 자신의 속도를 조절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70년대는 개념미술이 대두했던 때이며 ‘단색화’ 등으로 대표되는 미니멀리즘적인 추상미술이 거셌다. 유행이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두식은 동참하지 않았다. ‘생의 기원(起原)’을 주제로 그는 연필드로잉과 수채화를 주로 그렸다. 현미경으로 확대해 본 세포인 듯한 형상에서부터 과감한 생략을 넘나들며 여성의 인체와 식물 형태를 포착해 보여준 작품들이다. 개념미술의 급부상으로 ‘그리지 않는 시대’가 열린 그때 이두식은 오히려 손의 힘에 집중했다. 그는 약속 시간을 기다리며 휴지에 볼펜으로 그린 초상화 한 장으로 탄성을 자아내는 묘사력의 대가였다. 피카소가 잘했다는 선 몇개로 대상의 특질을 기막히게 포착해 내는 힘을, 이두식 또한 갖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태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 분석적인 태도와 감성적인 태도. 분석적인 태도는 반드시 에스키스를 한다. 작품을 하기 위해서는 보통 미리 설계도를 그려보고 옮긴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린다. 직관에 따라 즉시 감정을 표현해낸다.”

이두식은 스스로도 자신의 작업방식이 즉흥적이라고 했다. 분위기를 잡은 후 극치의 순간을 향해 치닫는 성행위에 비유하기도 했다. 작가가 직설적이면 감상자 또한 분석하고 따질 필요없이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판이 벌어지는 셈이다. 이두식의 그림은 꿈틀대는 생명체 같다. 꼭 형태 때문은 아니다. 색조와 필치에서 기운과 흥이 일렁인다. 강렬한 색채는 눈을 자극하고 그 에너지가 감성을 일깨운다. 뭘 어떻게 그렸느냐가 아니라 그저 시각적인 체험으로 감정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직관과 감성의 표현이 누구나 딱 보고 확 느끼는 그림을 만들었다. 쉽지 않은 추상미술임에도 그의 작품은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스스로 “고릴라 닮았다”며 못생겼다고 자평하는 그의 주변에 친구가 끊이지 않듯 말이다.

이두식의 그림은 로마 지하철역에서 벽화로도 만날 수 있다. 1996년 로마시는 우중충한 지하철 역내 분위기를 벽화로 바꾸고자 했다. 로마시내 11개 지하철역의 벽화제작을 위해 세계 9개국에서 27명의 작가를 선정하는 프로젝트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두식이 선정됐다. 하루 평균 10만 명의 유동인구를 자랑하는 로마 도심 포플로 광장 부근의 ‘플라미니오역’을 그가 맡았다. 가로 14m, 세로 2m의 대형 모자이크 벽화는 지금도 ‘안녕’하다.

이두식은 1984년부터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 교수로, 학장까지 지냈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원장을 맡았다. 예술가이면서 미술행정에도 밝았다. 다재다능한 멋쟁이였다. 그럼에도 매일 새벽 그림 그리는 일을 거른 적은 없었다. 1만점을 목표로 다작(多作)했다. 2013년 홍익대 현대미술관(HOMA)에서 열린 정년퇴임 기념전에 혼신의 힘을 쏟으며 “이것만 끝내놓고 좀 쉴거야”하던 그가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개막식 후 밤늦게 돌아온 새벽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지난 22일에 5주기 추모미사가 열렸다. 화가는 가고 없어도 그가 기운 불어넣은 축제는 끝나지 않는다. 그림은 여전히 힘이 넘친다.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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