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환의 집과 사람]물리적 재생 vs 경제적 재생

정비사업 핵심은 주거환경의 개선
집값안정 프레임에 매몰돼선 안돼
제대로만 지으면 100년도 간다지만
배관·주차 등 문제로 거주여건 악화
잦은 인위적 개입 시장 왜곡 부를수도

부동산에도 생애주기가 있다. 성장-후퇴-침체-회복의 사이클이다. 학자들은 부동산이 50년 안팎을 주기로 이같은 사이클을 겪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한국의 대표적 주거유형인 아파트의 생애 주기는 상업·업무용 부동산에 비해 생애주기가 훨씬 짧다. 과거 서울시내 대규모 저층아파트 사례를 보면 길어야 30년 안팎이다. 1970년대에 지어졌던 초기 저층 아파트들은 사실상 2000년대 들어 대부분 재건축이 마무리돼 두번째 생애 주기를 경험하고 있다. 변곡점은 바로 재건축이다.

사실 잠실 등 노후 저층 아파트들의 재건축이 이뤄진 것은 건물의 구조에 치명적인 하자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벽체가 너무 튼튼해 못이 제대로 박히지 않을 정도였다. 재건축의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된 이유는 현실에 맞지 않는 낡은 주거환경이었다. 당시 지어진 저층 아파트들에는 주차장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자가용이란 개념조차 생소한 시절에 지어졌던 탓이다. 난방 방식도 문제였다. 재건축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발코니 구석에 연탄보일러를 설치해 난방을 하는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소득 증가로 가족구성원당 필요 주거면적은 커지는 반면 주택면적은 기껏해야 10~20평 안팎이니 더 넓은 집에 대한 욕구가 커진 것도 이유다. 결국 안전의 문제가 아닌 주거환경 악화가 재건축의 주요 근거가 된 셈이다.

따지고 보면 신축 단계에서 심각한 부실 시공이 이뤄지지 않는 한 철근콘크리트 건물의 물리적 수명은 50년을 훌쩍 넘는다. 제대로만 지으면 100년도 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심지어 입주 초기 당시 바닷모래 사용 논란으로 당장 무너질 우려가 제기됐던 분당·일산 등 1기신도시 아파트조차 25년이 넘은 지금까지 실제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1980~1990년대 초반에 걸쳐 서울시내에 지어진 중층 아파트들의 사정도 저층 재건축 단지들과 사정은 비슷하다. 주차공간이 턱없이 부족해 매일 퇴근무렵이면 주차전쟁을 치르는 것이 일상화돼 있고 낡은 배관 탓에 물이 새서 하루가 멀다하고 주민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 비효율적 난방시스템과 부실한 단열 때문에 관리비는 새 아파트의 두배가 넘는가 하면 유난히 심한 한파를 겪었던 올 겨울에는 곳곳에서 배관이 얼어터지는 사고를 경험한 단지들이 부지기수다.

국토교통부가 재건축 안전진단을 대폭 강화하면서 시장에 미치는 파장이 만만치 않다. 나름대로의 보완 규정은 뒀지만 역시 논란의 중심은 안전진단의 가중치 조정이다. 구조체의 안전 비중을 20%에서 50%로 확 높인 반면 주거환경 비중은 40%에서 15%로 낮췄다. 정비사업 추진 허용의 판단 근거로 물리적 측면을 경제적 측면보다 우선하겠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슬럼화를 감내하더라도 주거지의 생애주기를 강제로 연장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양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재건축의 신규 주택 공급 기여도는 갈수록 낮은 것도 사실이다. 밀도가 낮은 저층 재건축이 거의 마무리된 상황에서 중층 재건축이 이뤄지더라도 멸실분을 고려한 주택의 순증분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양적 공급 확대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노후 주택의 재생을 통한 질적 변화다. 정비사업은 노후화로 슬럼화하는 도시를 재생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재건축에 대한 묻지마 기대심리가 강남권 집값을 과도하게 끌어올리는 현재의 상황이 곤혹스러운 정부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비사업이 주거의 질 개선에 미치는 긍정적인 경제·사회 효과를 무시한 채 이를 집값 안정이라는 프레임 안에 가둬서는 안된다. 시장에 대한 지나치게 잦은, 그리고 인위적 개입은 결국 왜곡을 낳기 마련이다.

/건설부동산부문 선임기자 dhchu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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