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인의 예(藝)-<51>오지호 '남향집']봄 마중나온 소녀...영롱한 햇살...움트는 생명의 기운을 담다

집·돌·지붕, 각각의 색깔로 존재감 드러내고
청색 그림자·노란색 담벼락 '순박한 맛' 살려
밝은 빛·청명한 자연에 적합한 표현법 담아
日 '외광파' 탈피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 개척
사후 대표작 34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도

오지호 ‘남향집’ 1939년작, 캔버스에 유채, 80x65㎝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볕이 따뜻해졌다. 그늘을 벗어나 볕 자리를 찾아 섰어도 찬바람이 마냥 시리기만 하던 겨울이 끝나간다. 햇볕에 서면 이제 온기가 느껴진다. 어찌나 햇빛이 좋은지 둥치 굵은 고목의 그림자가 검지 않고 파랗다. 태양빛이 너무 환하면 잠시 깜빡이는 눈앞이 보랏빛으로 아찔하게 뒤덮일 때가 있다. 그 파릇한 기운의 그림자가 지붕을 타고 올라 하늘까지 치솟았다. 그림자와 하늘이 같은 파란색이다. 이른 봄볕이 얼음뿐 아니라 그림자마저 녹인 모양이다.

오지호(1905~1982)의 ‘남향집’은 겨울 끝자락 봄 첫머리에 걸리기 탁월한 그림이다. 화가는 ‘한국의 모네’라 불려도 될 법한,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을 개척한 선구자다. 전남 화순의 큰 부잣집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서울로 유학해 휘문고보를 다니던 1922년 당시 만난 미술 선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1886~1965)이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난 덕에 재능을 깨우쳤고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오지호는 1935년 3월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그때부터 광복 직전까지 그가 살았던 집이 바로 그림 속 집이다.

문을 열고 막 나오려는 어린 소녀는 그 자체로 봄의 전령이다. 흰색 목깃 단정한 아이의 붉은 원피스는 봄에 움트는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얼었던 온몸에 활발히 돌기 시작한 핏빛 빨강이 약간 촌스러운 듯하나 그래서 정겹기도 하다. 작은 손을 옆구리 주머니에 푹 찔러넣은 모양새가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있는 것 같다. 하지만 외투를 걸치지 않고도 사립문 밖으로 나설 생각을 한 것을 보면 이 아이 역시 겨울이 끝났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살짝 숙인 소녀의 동그란 머리 위로 나비 닮은 노란 리본이 얹혀 있다. 아이를 그린 붓질이 손길로 쓰다듬은 듯 자상하다. 화가의 둘째 딸 금희란다. 그림을 그리던 1939년 그 해 5월 무렵 오지호는 신문 기고를 통해 ‘남향집’을 이렇게 소개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을 나는 이다지도 사랑한다. 그 까닭을 말로 한다면 너무도 평범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이 집 뒤로는 초록으로 덮인 조그만 동산이 있고, 저 앞으로는 열매들이 말갛게 홍옥처럼 반짝이는 앵두나무 과수원과 바로 그 옆으로는 넓은 채소밭이 있고 그것들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이 가엾기 때문이다. …지금 오월을 맞이한 이 집의 주위는 영롱한 신록이 바야흐로 무르녹아 가고 있다.”

집 주변의 풍광을 다 담지 못한 대신, 화가는 홍옥 같고 앵두 같은 딸을 그려넣었나 보다. 오지호가 ‘삽살이’라 부르며 예뻐하던 흰 개는 주인보다 먼저 나와 이른 봄볕을 쬐고 있다. 그림 오른쪽 담벼락 아래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는 녀석이다. 여기다 갓 구워낸 노릇한 소보로빵 색깔 흙담과 지붕이 그림의 정감을 더해준다. 집과 돌과 지붕이 각각의 색깔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색깔별로 대상을 나눠 표현한 인상파 기법인데, 색 그 자체로 밝은 햇살의 강도를 느끼게 해 준다. 그림자의 청색과 담벼락의 노란색은 어울리지 않는 색의 조합일 수도 있으나 그 순박한 맛이 향토색을 느끼게 하며 묘하게 잘 맞아떨어졌다. 옷을 이렇게 입고 나선다면 “촌티 난다”는 핀잔을 들을 법한데도 말이다.

오지호의 1960년작 ‘봄 풍경’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오지호의 부친은 대한제국 말기에 전남 보성의 군수를 지냈다. 그러나 막내가 15세이던 1919년 서울에서 고종황제의 장례식과 3·1 독립운동을 목격한 그는 민족의 현실에 울분을 끝내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국지사였다. 아버지를 닮지 않은 아들은 없다. 해방 후 오지호는 일제 식민지 기간에 총독부가 주관한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적극 동참해 화단의 주도권을 잡은 일부 화가들이 여전히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는 작태에 분노를 참지 못했다. 예술가의 지조를 “비단 예술활동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요, 사회적 활동에도 발현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믿은 오지호는 지조 없는 그들을 향해 “작은 이익에 몸을 팔고, 즐겨 불의의 앞에 주구(走狗·좇아가는 개)가 되는 예술가”라 비판한 후 1948년 8월 미련없이 서울을 등지고 광주에 정착한다.


화가의 결연한 다짐이 호남 화단에는 행운이 됐다. 소백산맥으로 나뉘는 영남과 호남은 사투리와 기질 만큼이나 화풍도 다르게 발전했고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화단과 광주·전주 등 예향에 기반을 둔 호남화단이 분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그 호남 지방의 서양화풍을 맨 앞에서 이끈 이가 바로 오지호다.

오지호가 근대화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까닭은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서양화 기법을 완전한 우리 것으로 토착화했기 때문이다. 성공했고 탁월했다. 조선이 서양에 문호를 개방했지만 신식 문물의 상당 부분은 일본을 거쳐 유입됐다. 그중 하나가 미술이다. 일본미술인 우키요에(浮世繪)가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줬고 꼭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일본은 유독 인상주의 회화에 열광했다. 일본은 인상파 미술을 자신들에 맞게 적용시켜 외광파(外光派) 회화라는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냈다. 일본에서 공부한 오지호가 처음 배운 것도 외광파였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일본의 기후와 풍토에 기인한 화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하는 내 나라 조국산천을 그리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 말이다. 암갈색의 어둡고 침울한 색조로 초봄의 풍경을 그린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연의 생생한 인상과 감동이 사라졌음을 자각했다. 일제의 문화통치에 의해 알게 모르게 일본의 영향이 주입된 것이었다.

오지호의 1976년작 ‘북구의 전원’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벗어나기로 했다. 오지호는 한국인의 따스한 감성과 우리나라의 밝은 태양빛, 청명한 자연환경에 적합한 표현방법을 연구했다. 외광파가 아니라 유럽의 정통 인상파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여기다 사물의 내부에서 뻗어나오는 강렬한 생명력까지 화면에 담으려 했더니 야수파 화풍에도 근접했다. 나중에는 과감한 표현주의적 경향도 보여준다. 그와 같은 세대 대부분 화가들이 일본식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과 비교하면 그는 분명 앞서 간 미술가였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컬러판 화집을 발간한 기록의 소유자다. 1938년에 동료 화가 김주경과 함께 총천연색 도록을 제작해 선보였다. 사비를 들인 파격적 시도였는데, 인상주의 화풍을 추구하며 색채를 중시한 그가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남향집’은 지난 2013년에 문화재로 지정됐다. 등록문화재 제536호다. 인상파 미술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한국적 토착화를 이룬 역사적 가치가 높이 평가됐다. 또 오 화백이 조선대 교수로 근무하던 1954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가까이 산 광주 동구 지산동의 초가집은 ‘오지호가(家)’라는 이름으로 광주시도기념물 제6호로 지정돼 있다. 옛 딸기밭 아래에 지은, 100년도 더 된 조선 말기의 집이다. 6평 정도의 이 집 문간채가 작가의 화실로 쓰였는데 북쪽으로 난 창문이 인상적이다. 개성의 남향집 못지않게 빛이 잘 들어오게끔 만들어 놓은 채광창이다.

오지호 화백이 말년인 1981년에 그린 ‘꽃-델피니움’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그 집에서 자란 아들들이 대를 이어 그림을 그렸다. 큰아들 오승우(88)는 인상파적 기법으로 그리되 더욱 강렬한 야수파적 경향을 보인 화가다. 색깔있는 원로화가로 1993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됐으며 전남 무안군에 오승우미술관이 건립돼 있다. 그의 동생이자 오지호의 둘째 아들인 오승윤(1939~2006) 역시 화가로 프랑스 유학까지 다녀와 왕성하게 활동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났다.

오지호 화백 사후에 유족들은 대표작 34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한국의 사계는 제대로 한국적이라 정겹고 노년에 여행 다니며 그린 외국 풍경은 너무나 이국적이라 감탄하게 된다.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그곳의 햇빛과 생명의 기운에 정직했고 충실했기 때문이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유독 추웠던 겨울’ 등의 표현이 없었던 철이 있던가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기(寒氣) 매서웠던 이번 겨울이 꼬리를 내리고 있다. 때를 기다리면 언제고 햇볕들 날은 오기 마련이다. 그 볕이 어디 책상머리, 내 집 앞마당뿐이겠나.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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