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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서로에 대한 찬사였다. 빈말이 아니었다. 유준상은 “연극적인 요소가 강하고 캐릭터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왕용범 뮤지컬에 계속 출연한다는 것은 배우로서 끊임없이 성장할 기회를 얻는다는 의미”라며 “10년 전 왕 연출은 30대 초반의 젊은 연출가였지만 그의 빈틈 없는 연출지시를 보고 첫 연습에서 ‘이 사람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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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연출자 시절엔 배우들이 잘 따라주지 않아 혼자 눈물 흘린 적도 많았단다. 그러나 연습실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유준상이 합류하곤 얘기가 달라졌다. 특히 호흡을 맞췄던 배우, 스태프들과 주로 작업을 이어가는 왕 연출에게 유준상은 극단장 같은 사람이다. 왕 연출은 “배우를 잘 알수록 많은 걸 끄집어낼 수 있다는 믿음 탓에 일종의 극단 체제를 고집하는데 유준상은 그 체제의 중심축”이라며 “가장 먼저 대본을 외워오고 연습 분위기를 바로 잡아주는 선배 덕분에 삼총사, 프랑켄슈타인, 벤허 등 많은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작품들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보여줄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체코 뮤지컬을 스몰 라이선스 형태로 들여와 왕 연출이 재창작 수준으로 다듬은 ‘삼총사’는 당시 일본에도 진출하며 뮤지컬 한류의 주춧돌을 놓았다. 지금도 당시 일본 무대에 섰던 유준상, 엄기준, 신성우 등을 만나러 일본 팬들이 한국을 찾는다. 왕 연출은 “초연 직후 일본에 초청됐고 일본 관객들이 한국에 와서 공연 보는 문화가 생겼으니 한류의 시초가 된 작품”이라며 “일본 관객들의 환호성을 보며 한국 관객보다 조용하다는 편견이 단박에 깨졌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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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흘러 다시 작품을 만난 유준상 역시 감회가 새롭다. “프랑켄슈타인과 벤허에서 인간이 무엇인지, 나는 왜 이렇게 작은 사람인지 매일 밤 고뇌하다 보니 그새 저 역시 성숙했나 봐요. 10년만에 삼총사 대본을 다시 들여다 보니 대사가 더 선명하게 와닿고 삼총사의 의리가 정말 깊은 우정과 사랑의 감정으로 가슴 깊이 다가오더라고요.”(유준상)
3~4년 뒤 작품 계획은 배우와 공유하는 왕 연출 스타일답게 두 사람의 다음 도전도 이미 정해졌다. 단테의 ‘신곡’이다. 왕 연출은 “프랑켄슈타인, 벤허와 함께 ‘신(神) 3부작’의 완결판이 될 작품”이라며 “유준상은 신이 되려 한 남자, 신을 만난 남자, 신을 죽여야 하는 남자를 모두 연기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왕 연출이 유준상을 모델로 구상중인 작품이 또 있다. 유준상의 팔순을 기념해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서 모노 드라마 형식의 뮤지컬 ‘노인과 바다’를 선보이고 싶단다.
왕 연출은 “버킷리스트에서 벤허는 죽기 전에 올릴 작품이었는데 선배님을 보며 ‘혼자 배 위에서 바다와 싸워줄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어 ‘노인과 바다’로 계획을 수정했다”면서 대뜸 유준상을 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그때까지 발성연습 게을리 하지 마세요.” 눈물 많기로 소문난 유준상의 눈에 물기가 비쳤다.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사진=권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