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국 철강업체 동남아시아 법인을 겨냥해 반덤핑 관세폭탄을 던졌다. 미 수출길이 막힌 한국이 동남아 법인을 통해 미국으로 물량을 쏟아낼 수 있으니 미리 손을 써둬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연이은 통상제재로 입은 타격을 해외 법인 생산량 확대로 상쇄하려던 철강업계에 또 다른 악재가 날아든 모양새다.
4일 철강업계에 따르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최근 인도네시아산(産) 후판에 반덤핑 관세(48%) 연장 결정을 내리면서 포스코의 인도네시아 법인인 크라카타우포스코를 걸고넘어졌다. 생산량을 늘리고 있는 크라카타우포스코가 미국으로 물량을 쏟아낼지 모른다는 자국 철강업계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미국 철강업체들은 고강도 통상제재로 직접 수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이 동남아 법인을 이용해 ‘우회 수출’을 꾀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전달해왔다.
미국발 보호무역주의 광풍이 거세지는 가운데 동남아 법인을 탈출구로 여겨온 포스코는 바짝 긴장하고 있다. 철강 수요가 늘고 있는 동남아는 국내 철강업계에 얼마 안 남은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다. 도로·철도 등 인프라 관련 프로젝트가 늘면서 현지 철강 수요도 함께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인도네시아 정부는 올해 인프라 구축을 위해 전년보다 15% 높은 342억1,053만달러(38조3,700억원)의 예산을 할당해둔 상태다.
미국의 압박이 거세지면서 동남아 시장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통상 제재로 줄어든 판매량을 회복하려면 동남아에서 더 많은 물량을 팔아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남아 국가가 미국발 통상 공세에서 한발 비켜나 있는 만큼 현지 법인 생산 물량을 늘려 미국에 보낼 수도 있었다.
포스코가 인도네시아 국영 철강사인 크라카타우스틸과 합작 회사를 만든 뒤 조강 생산량을 매년 끌어올린 것은 이 때문이다. 크라카타우포스코는 2014년 63.4%였던 공장가동률을 지난해 98.7%까지 높였다. 권오준 포스코 회장은 지난해 3월 연임에 성공하자마자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을 직접 만나 “인도네시아가 추진하는 초대형 철강 클러스터를 만드는 데 포스코가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며 강한 추가 투자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다른 철강업체도 동남아 진출에 속도를 내고 있었다. 세아제강은 통상제재 압력이 거세질 기미를 보이던 지난해 베트남 남부 동나이성에 연산 7만5,000톤급 강관공장 착공에 돌입했다. 업계에선 현지 철강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는 데다 미국이 베트남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있는 점을 배경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8%대의 반덤핑관세가 46%까지 뛰어오르며 대미 수출이 막힌 넥스틸 역시 태국에 생산공장을 세우는 방안을 검토하고 나섰다.
하지만 미국이 포스코 인도네시아 법인에까지 손길을 뻗쳤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몇 안 남은 도피처인 동남아마저 위험한 것 아니냐는 암울한 전망이 흘러나온다. 당장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면 동남아를 대미 수출 우회 기지로 삼으려던 계획이 무산될 수 있다. 미국이 이번처럼 한국 공장을 이유로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현지에서도 한국 업체의 투자를 반기지 않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업계에서 짜낼 수 있는 자구책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얘기다. 거듭된 미국의 통상제재로 한국에서 미국으로의 직접 수출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의 대미 수출은 2014년 57억5,000만달러(591만톤)에서 지난해 36억9,000만달러(372만톤)로 35% 가까이 급감했다. 재작년부터 개별 철강재를 조준해 고율의 반덤핑·상계관세를 부과하던 미국은 급기야 모든 철강재를 융단 폭격할 수 있는 무역확장법 232조 카드까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국산 철강재에 25%의 추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232조가 실제 시행되면 사실상 미국으로의 직접 수출은 당분간 포기해야 한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일부 업체가 아예 미국으로 들어가는 방안을 검토 중이나 이마저 여의치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종 제품에 대한 관세는 피할 수는 있겠지만 원자재 조달 문제가 발목을 잡는다. 미국 내 경쟁 업체들이 원자재를 내주지 않으려 해 한국에서 물량을 들여와야 하는데 미국이 이미 한국산 자재엔 고율의 관세를 붙여놓은 터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에서 자재를 들여오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일찍이 미국에 진출했던 UPI(포스코 미국 법인)나 OCC(TCC동양 미국 법인)가 이 같은 문제로 수년째 적자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은 업계의 시름을 깊게 하고 있다.
/김우보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