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증권 반포WM센터는 지난해 국내 증권사로는 처음 대체투자학교를 만들어 WM영업의 다각화를 시도했다. 반포WM센터에서 고객들이 PB들의 투자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대신증권
# 지난 1995년 보람은행이 국내 최초로 PB(Private Banker)제도를 도입했다. 당시 은행들이 계수 위주의 규모 경쟁에 치중할 때 보람은행은 맥킨지의 내실경영을 하라는 컨설팅 결과를 받아들여 PB와 RM(기업고객 전담행원) 제도를 정착시켰다. 1998년 하나은행과의 통합 과정에서 상당수 보람은행 PB가 미래에셋증권(현 미래에셋대우(006800))으로 이직했다. PB들이 금융투자 업계로 진입하며 자산관리(WM·Wealth Management)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 “주식약정을 직원평가 항목에서 완전히 제외하고 자산확대에 집중한다.” 황영기 전 금융투자협회장이 삼성증권(016360) 사장 시절인 2002년 12월 발표한 충격적인 브로커리지 영업 중단 선언이다. 삼성증권은 주식약정 위주의 영업 관행을 깨고 WM 영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증권사들의 수익구조가 주식영업에서 WM으로 넘어오며 PB들의 역할이 확대되고 있다. 주요 증권사들은 과거 은행에서 고액자산가만을 상대하던 PB들의 역할을 대중화시켰다. 영업직 직원들을 PB로 전환시키기 위해 대학과 연계된 PB 교육 과정을 만들고 마스터PB 등의 등급별 PB 인사제도도 구축됐다. 주요 도심에 PB센터가 등장하며 고액자산가뿐만 아니라 일반고객을 대상으로 한 WM 서비스가 시작됐다. 증권사는 고객에게 주식거래 ‘종목’을 집어주던 모습에서 다양한 상품과 해외자산을 선별하는 WM 서비스에 집중했다.
WM으로 빠르게 체질개선이 되는 듯했지만 브로커리지 영업의 유혹은 강했다. 시행착오도 잦았다. 일부 증권사는 화려한 PB센터와 브랜드를 내놨지만 1년도 안 돼 폐쇄했다. 브로커리지 강화를 내세운 증권사의 실적 향상을 따라갈 수 없게 되자 슬그머니 WM 사업을 축소시키고 다시 주식중개를 강화했다. PB들의 혼선도 커졌다. 한 대형 증권사 PB는 “결국 실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브로커리지에 집중하면서도 PB 명함을 들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며 “일부 PB는 계열운용사 펀드로 포트폴리오를 꾸려 일종의 ‘펀드 팔이’에 골몰했다”고 지적했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으로 고객 자산을 관리하는 PB 본업과 달리 고객 자녀들 혼사와 유학 상담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액자산가를 유치하기 위해 골프접대는 기본이고 김장을 대신해주고 집안 대소사를 해결해주는 게 PB가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받아들였다. 다른 증권사 PB팀장은 “내놓을 수 있는 게 주식과 채권, 주가연계증권(ELS) 정도의 파생상품에 머물렀다”며 “금융상품에 차별화를 시키지 못하는 PB들은 3~4곳의 PB센터를 이용하는 고객을 붙잡기 위한 관계지향형 PB에 머물렀다”고 말했다. 미국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의 자산관리부문 부사장을 역임한 황웅성(미국명 피터 황)씨는 “PB는 고객들에게 안정적이고 꾸준한 수익을 안겨주는 사람”이라며 “고객이 재테크와 노후 설계를 맡기고 여행을 떠날 수 있을 정도의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2002년 삼성증권 뉴욕법인장 이후 메릴린치로 이직해 전 세계 4만명의 메릴린치 WM 부문 PB들을 총괄했다. 국내 PB들의 대표적인 롤모델로 꼽힌다. 지난해 미국 자산관리업체인 스노든레인파트너스에 아시아권 고객을 담당하는 시니어 파트너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15년간 그는 메릴린치 WM 부문에서 최고 성과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PB는 리스크를 줄이고 실적을 최대한 올릴 수 있는 투자를 통해 고객의 자산과 회사 수익을 늘리는 데서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단기 수익에 치중하는 국내 금융투자 환경에서 안착이 어려웠던 국내 PB 비즈니스는 2015년부터 빠르게 본업의 성격을 찾아갔다. 주요 증권사들이 WM에서 성장동력의 확신을 가지면서부터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의 순영업수익에서 브로커리지 비중은 2002년 75%에서 지난해 30%대까지 줄었다. 그 자리는 WM이 대신하기 시작했다. 증권사들이 더 이상 주식매매 수수료 장사로는 어렵다는 판단에서 WM 사업으로 얻는 수익에 집중하고 있다. 브로커리지보다 상품 판매 실적을 높게 책정하고 성과지표 기준도 잇따라 바꾸고 있다. 자산관리 조직의 확대와 개편, 축소가 반복되는 과정에서 젊은 PB들이 분위기 쇄신에 나선 것도 한몫하고 있다. 고객 유지에 급급해 고객의 집안 대소사를 책임지는 형태의 관계지향형 PB를 거부하고 철저하게 고객 수익률 관리에만 집중하는 수치지향형 PB들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나금융투자의 ‘클럽원(CLUB1)’ 금융센터가 대표적이다. 이승호 하나금투 클럽원 금융센터 상무는 “PB는 ‘수치’로 증명하는 직업”이라며 “고객의 집안일을 해결해주기보다 상품을 기획해 고객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매일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상무는 IB 업무에 국한될 것으로 보이는 기업 인수합병(M&A)과 지분투자 등의 딜(deal)에서도 리테일 업무 범위 안에서 상품기획력을 발휘하고 있다. 아울러 하나금투의 청담금융센터가 이전한 클럽원 금융센터는 음악·영화 감상과 식사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일종의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려져 그랜드오픈을 앞두고 있다. PB센터를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기 위해 고객이 ‘찾아오게 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새로운 PB 서비스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WM 출발이 늦었던 대신증권(003540)에서 홀로 PB 영업을 시작한 장영준 반포WM센터장도 PB 비즈니스의 변화를 일으켰다. 장 센터장은 2013년 대신증권 압구정 부지점장으로 자리를 잡은 후 파생상품과 채권·펀드에 강한 전문가를 한 팀으로 꾸려 고객을 집중 관리했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그룹 재건의 일환이었던 금호고속 인수자금을 2016년 헤지펀드를 통해 투자하기도 했다. 개인이 기업에 직접자금을 조달하는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지난해 문을 연 반포WM센터는 대신증권의 첫 PB센터다. 장 센터장은 국내 증권사 최초로 대체투자학교를 열어 투자자와 함께 대체투자 노하우를 익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단순히 상품을 팔기보다 고객에게 상품구조와 설계 단계부터 설명을 하겠다는 게 목표다. 장 센터장은 “노후자금을 지키려는 고객을 대상으로 준확정금리의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상품은 대체투자가 가장 적합하다”며 “안정적인 수익의 대체투자 상품을 지속적으로 발굴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종호·김연하기자 joist1894@sedaily.com